‘자주포’ 잘못 쓰면 집·산토끼 다 놓친다
▲ 민주당 손학규 대표(오른쪽)가 4대강 사업 저지 등 ‘연평도 출구전략’ 모색에 나섰다. 사진은 정동영 의원과 연평도 포격 피해지역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 국회사진기자단 |
손 대표는 그 출정식이나 다름없는 당 회의에서 “4대강 예산 저지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온몸을 바칠 것”이라고 결연한 의지를 내비쳤다. 이명박 대통령을 겨냥한 비판의 수위도 높아졌다. “안보정국을 틈타 4대강 예산 강행처리,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졸속 처리를 시도하고 있다”는 정도는 점잖은 편이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민생을 짓밟는 일, 국익을 좀먹고 자연과 생명을 파괴하는 일을 결코 방관하지 않겠다”고 쏴붙이고 있다.
손 대표의 ‘연평도 출구’ 모색은 서해에서 진행된 한미합동훈련이 종료된 뒤 북한의 추가도발에 대한 경계수위가 다소 내려가면서 사실상 예견됐던 수순이다. 북한의 무력도발 이후 제1야당 ‘원외대표’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쉽지 않았고, 한편에서는 손 대표가 북한과 관련해 ‘징크스’가 있는 게 아니냐는 말까지 나돌았기 때문이다. 지난 2006년 10월 9일에도 북한이 전격적으로 핵실험을 하는 바람에 이날로 끝난 손 대표의 100일 민생대장정이 크게 주목을 끌지 못했었다.
게다가 “전쟁은 해결책이 아니며 평화의 길을 가야 한다”는 ‘평화해결론’으로는 대북 강경 기류가 강한 안보정국에서 동력을 얻기가 힘들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손 대표도 결국 ‘안보 대 평화’의 국면을 ‘무능정부 대 강한 야당’의 구도로 전환시켜야 할 결절점에 다다랐다고 판단한 것이다.
손 대표의 장외투쟁은 대외적인 존재감을 찾으려는 필연적인 선택이면서, 대내적으로도 또 다른 정치적 의미를 던지고 있다. 자신을 둘러싼 당내 ‘정체성 논란’의 종지부를 찍자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지난 전당대회에서 호남 지역에서 최다 지지를 받으며 시험대를 통과한 듯 보였다. 하지만 손 대표가 지난 11월 30일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햇볕정책은 모든 것을 다 치유하고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며 “햇볕정책은 서로 상대를 해주는 것이고 평화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지, 완전히 충분한 조건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놓고 당 내부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이 발언은 손 대표가 이날 행한 전체적인 답변의 맥락에서 보면, 햇볕정책에 대해 ‘무조건 북한을 봐주자는 것이냐’는 패널들의 질문에 대해 나름대로 반박하려 꺼낸 논리적 수사일 뿐, 실제적으로 햇볕정책의 한계를 지적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는 게 중론이다. 그런데도 당 안팎에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이를 정체성 문제로 몰아갔다. 정동영 최고위원은 “햇볕정책을 수정하면 민주당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공격했고, 박주선 최고위원 등은 “햇볕정책은 민주당의 정체성을 판단하는 기준”이라고 견제구를 날렸다.
급기야 부산 출신의 김정길 전 의원이 화룡점정을 했다. 노무현 정부 시절 행정자치부 장관을 지냈던 그는 “햇볕정책과 관련해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손학규 대표는 민주당에 ‘위장취업’한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그는 “대권을 의식한 손 대표가 진보와 중도, 보수층을 모두 의식하다 보니 햇볕정책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손 대표의 이 같은 행보 때문에 민주당은 집토끼와 산토끼 모두 잃을 우려가 있다”고 힐난했다.
그의 비판은 평화해결론이라는 소신과 대북 강경론이 우세한 국민 정서 사이에서 잠시 흔들렸던 손 대표의 정곡을 찌른 것이다. 진보세력의 마음을 얻는 것도 중요하지만, 종국에는 중도까지 포용해야 한다는 손 대표의 정치노선에 대한 친노무현 진영의 비판적인 시각을 담은 것이기도 했다. 민주당 내에서 금과옥조로 여기는 햇볕정책에 대해 ‘수정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송민순, 강봉균, 정장선 의원 등 중도보수 성향의 손 대표 측근들이라는 정황도 그처럼 격한 반발을 불러온 한 요인이었다.
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 당시 손 대표의 햇볕정책에 대한 ‘만병통치약 발언’은 사전에 준비된 발언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 측근은 “예전에 지역구에서 노인층 가운데 햇볕정책에 대한 오해가 많아서 ‘과거 햇볕정책이 모든 것을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는 걸 강조하기 위해서 썼던 말인데, 거기에서는 ‘손학규가 유연하다’는 식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던 터라 손 대표가 토론회에서 별다른 문제의식 없이 그 말을 불쑥 해버렸다”고 설명했다. 손 대표는 자신의 발언이 ‘실언’으로 몰리자 “어떻게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느냐”며 매우 불편한 심사를 드러냈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당내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입방아가 쉽게 수그러들 기세가 아니었다. 한 측근은 “그래서 손 대표가 고민 끝에 친분을 나누는 목사님들을 모시고 원탁회의를 했는데, 모두 ‘4대강 문제, 대포폰 문제를 놓고 몸을 불사르라’고 하더라”고 전했다. 결국 그 말이 손 대표가 지난 2일 정국 전환을 위해 마련한 특별기자회견에서 화두가 돼버렸다. 이 측근은 매우 비장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전망을 보탰다.
“만약 오는 9일에 새해 예산안이 국회에서 처리된다면 손 대표는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싸움은 내년까지도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의 말은 장외투쟁에 나서는 손 대표의 의지가 어느 정도인지를 표현한 것이다. 하지만 김정길 전 의원이 지적한 대로, 손 대표가 지금 집토끼, 산토끼를 모두 잃을 위기에 놓여 있다는 뜻으로도 읽혔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