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도 연모한 ‘매혹의 화신’
1901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마를렌느 디트리히는 프러시아 장교의 딸이었고 어머니는 중류 귀족이었다. 디트리히가 어렸을 때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는 재혼했으나 계부조차 1차 대전에서 전사했다. 어린 시절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며 음악가의 꿈을 키우던 디트리히는 손목을 다치면서 꿈을 접는다. 대신 드라마 스쿨에 들어간 디트리히는 21세에 베를린 극장에서 배우로 데뷔했고 22세에 루돌프 지베르와 결혼해 다음 해에 마리아라는 딸을 낳았다. 그들은 이혼하진 않았지만 5년 정도 함께 산 후 줄곧 별거 상태였다.
단역으로 종종 영화에 출연했던 디트리히를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이끈 사람은 당시 영화 스태프였던 남편 루돌프였다. 그는 디트리히를 당대 최고의 독일 감독인 조셉 폰 슈턴버그 감독에게 데려간다. 미국과 독일을 오가며 성공을 거두던 슈턴버그는 디트리히에게 배우가 아닌 여자로서 매혹되어 있었고 <푸른 천사>(1930)에 그녀를 캐스팅한다.
고등학교 교사가 카바레 무대의 여가수에 반해 일생을 슬프게 마친다는 비극적인 이야기의 <푸른 천사>는 디트리히에게 전환점을 마련해준 영화로서 이후 그녀는 슈턴버그 감독과 함께 <모로코>(1930) <불명예 Dishonored>(1931) <상하이 익스프레스>(1932) <블론드 비너스>(1932) <진홍의 여왕>(1934) <여자는 악마다>(1935) 등의 영화를 만들어 나갔다.
슈턴버그 감독이 만들어낸 ‘디트리히 캐릭터’는 뇌쇄적인 창부 혹은 남장 여인이었다. <모로코>는 디트리히의 첫 미국 영화였는데 모로코의 술집 여자 아미가 두 다리를 드러낸 채 신비한 미소를 짓는 커다란 포스터로 더 유명해진 작품이다. 영화사는 그들의 새 스타를 홍보하기 위해 이 포스터를 미국 전역의 술집에 배포해 화제가 되었다. 이 작품에서 디트리히는 실크 햇을 쓴 남성 정장 차림을 보여주고 그녀의 모습에 여성 관객들은 은밀한 욕망의 환호를 보냈다. <블론드 비너스>에서 그녀는 털옷을 하나씩 벗어던지며 늘씬한 다리를 드러내는 댄서로 등장하며 트레이드마크인 ‘세기의 각선미’를 각인시켰다.
당시 슈턴버그는 영화라기보다는 디트리히의 육체에 대한 찬가에 가까운 작품들을 만들었고 급기야 감독의 아내는 이혼 소송을 제기하며 남편과 디트리히에게 각각 60만 달러의 위자료를 청구했다. 하지만 슈턴버그의 아내는 디트리히로부터 “불쌍하신 분이군요. 당신 남편과 저는 아무 관계도 아닙니다”라는 굴욕적인 말을 들어야 했고 이혼 당한 슈턴버그 감독은 이혼 후 급격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50대 후반까지 왕성한 활동을 펼치던 디트리히는 1975년 <라스트 지골로>를 마지막으로 은막에서 사라졌고 1992년에 세상을 떠났다. 히틀러의 구애를 받았고 조셉 P. 케네디와 존 F. 케네디 부자와 관계를 맺기도 했으며, 또 헤밍웨이와 뜨거운 연애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다. 하지만 디트리히는 그 명성에 비해 이렇다 할 스캔들을 남기지 않은 배우였다. 살인적인 각선미의 소유자였지만 실제로는 남자라는 루머가 돌 정도로 남장이 잘 어울렸던 여배우. 그녀는 남성과 여성의 성차를 순식간에 뛰어넘을 수 있었던 초성적인 매력을 지닌 몇 안 되는 스타 중 한 명이었으며, 그녀만큼 욕망을 자극하는 배우는 흔치 않았다.
“나는 여배우가 아니다. 단지 한 명의 사람일 뿐”이라고 말했던 디트리히는 자신이 신화적 존재로 미화되고 추앙받는 것을 거부했다. 영화 일을 단 한 번도 즐겨 본 적이 없다고도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미지는 수많은 관객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블랙홀과도 같은 그 무엇이었고, 이후 그녀만큼 신비로운 여배우는 등장하지 않았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