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어 낚겠다더니 먼지만 터나
▲ 검찰이 요란하게 대기업 수사를 시작했지만 3개월이 넘도록 뚜렷한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
지난 9월 16일 검찰이 한화그룹 장교동 본사를 압수수색하자 재계에는 우려가 현실이 됐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리고 한 달 뒤 검찰은 또 다시 태광그룹의 편법증여 의혹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두 기업에 대한 동시 수사에 들어간 지 3개월. 과연 검찰은 요란한 출발에 걸맞은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을까.
지난 9월 대기업의 비리를 들춰내겠다는 검찰은 기세등등했다. ‘대기업의 저승사자’란 별명이 붙은 남기춘 지검장의 서울서부지검이 선봉에 섰다. 서부지검 형사5부(부장검사 이원곤)는 지난 9월 16일 한화그룹 본사를 시작으로 계열사 10여 곳을 압수수색했고 김승연 회장과 계열사 사장을 비롯한 그룹 관계자 100여 명을 불러 조사했다.
3개월간의 수사 자료를 바탕으로 검찰은 지난 1일 김승연 회장을 소환했다. 다음날에는 그룹의 전임 최고재무책임자(CFO)였던 홍동옥 여천NCC 사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법원에 청구했다. 검찰은 홍 사장이 김 회장의 지시를 받아 총 1조 원대의 비자금을 주무른 정황이 드러났다고 구속 사유를 밝혔지만 서울서부지방법원은 이를 기각했다. 게다가 법원이 영장기각 사유로 ‘방어권 보장이 필요한 사안’이라고 밝혀 영장을 재청구한다 하더라도 구속수사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한화그룹 비자금 수사에서 법원의 영장 기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검찰은 한화그룹의 비자금 조성 의혹을 풀 수 있는 ‘키맨’으로 홍 사장을 점찍었다. 수사팀은 홍 사장을 구속한 뒤 김 회장의 비자금 조성 개입을 입증하겠다는 복안이었지만 영장이 기각되면서 당초 계획이 전부 틀어진 것이다. 영장이 기각되자 수사팀은 큰 충격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내부에서도 한화그룹 수사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이 적지 않다. 대검찰청의 한 관계자는 “한화그룹 사건의 경우 압수수색이 생명이었는데 용역업체 직원들이 막아서서 시간이 지연되는 순간 이미 수사가 판가름이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과거에 대기업 총수를 수사할 때는 이미 증거를 확보한 상황에서 소환이 이뤄졌고 ‘소환은 곧 구속’을 의미했다”며 “김 회장을 수차례 소환하는 것은 그만큼 수사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홍 사장도 영장실질심사에서 혐의를 둘러싼 대략의 사실관계는 인정했지만 ‘범죄행위로 보기에는 법리적 논란이 크다’며 검찰의 주장을 세세히 반박했고 법원도 이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 향후 법정 다툼도 쉽지 않음을 예고하고 있다.
서울서부지검은 한화그룹에 대한 수사를 진행함과 동시에 태광그룹에도 칼끝을 겨눴다. 박윤배 서울인베스트 대표의 제보를 바탕으로 내사를 진행하던 검찰은 지난 10월 13일 장충동 태광그룹 본사를 전격 압수수색하며 대대적인 수사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수사팀은 이호진 회장의 집과 집무실, 계열사, 협력사 등 20여 곳을 압수수색하고 오용일 태광산업 부회장 등 그룹의 최고위 인사 수십 명을 조사했다.
수사 대상 역시 이 회장의 외아들 현준 군에 대한 편법 증여 의혹에서 비자금 조성 의혹으로 확대됐고 태광이 복수종합유선방송사업자(MSO) 큐릭스를 편법 인수하고 정·관계를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는 의혹도 다시 불거졌다. 이 과정에서 현 정권 실세에 대한 이름도 흘러나오며 대형 게이트로의 확전 조짐까지 보였다. 그러나 2개월여 동안의 수사에도 불구하고 수사팀은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번 사건의 핵심 인물인 이선애 상무(이호진 회장 모친)가 고령을 이유로 소환에 불응하며 수사가 난관에 부딪친 것도 있지만 이 상무를 압박하지 않고서는 마땅한 결과물을 내놓을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어려운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제기되고 있다. 대검찰청의 다른 관계자는 “태광그룹 수사는 뒤질 만한 곳은 다 뒤졌지만 비자금 조성이나 정·관계 로비 의혹과 관련한 결정적인 연결 고리를 찾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 남기춘 지검장. |
정치권에서는 검찰이 이번 한화와 태광 수사를 시작으로 대기업과 금융권을 강하게 압박하며 현 정부의 ‘공정사회론’을 뒷받침할 것으로 전망했다. 만약 이번 수사에서 이렇다 할 결과물을 내놓지 못한다면 그 추동력을 상당부분 상실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기업들 사이에서는 ‘검찰이 애꿎은 기업들만 압박한다’는 볼멘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검찰이 먼지털이식 수사를 하면 뭐 하나 걸리지 않을 기업이 어디 있겠느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검찰 외부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바꿔 놓을 만한 카드로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의 C&그룹 수사를 꼽고 있다. 중수부는 지난 16일 C&그룹 임병석 회장을 추가 기소하며 임 회장을 압박하고 있다.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에서 ‘대어’가 나오길 학수고대하는 분위기다. 수사를 통해 C&그룹 정·관계 로비 의혹이 사실로 밝혀질 경우 검찰이 갖는 부담감은 한층 줄어들 전망이다. 최근 김준규 검찰총장이 신한금융지주 CEO(최고경영자)들에 대한 구속수사 방침을 밝힌 것도 이런 연장선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박혁진 기자 ph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