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좁은 문 뚫고 재정신청 인용…조남관 총장대행 만나 상해치사 처벌 재요청
2016년 9월 8일 안면윤곽 수술을 받던 권대희 씨가 뇌사상태에 빠졌다. 그는 49일 뒤 끝내 사망했다. 권 씨의 어머니이자 환자권익연구소를 설립한 이나금 소장은 병원 CCTV와 의무기록지 등을 입수해 아들의 죽음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CCTV 속 수술실의 실태는 끔찍했다. 집도의사는 오랜 시간 수술실을 비웠고 간호조무사는 권 씨를 지혈하며 눈화장을 하고 휴대전화를 사용했다. 간호조무사는 수술 중 바닥에 쏟아진 권 씨 피를 대걸레로 닦기도 했다.
수술 도중 의사는 모두 나가버리고 간호조무사 혼자 시술하는 모습이 CCTV에 담겨있다. 사진=권태훈 씨 제공
유령수술 문제를 오랫동안 지적해온 성형외과 전문의 김선웅 원장은 “안면윤곽술을 하면서 (출혈량이) 300~400cc만 되어도 굉장한 비상상황이라고 인지한다”면서 권대희 씨의 출혈량이 3500cc에 달한다는 설명에 충격을 받기도 했다. 유령수술이란 환자가 성형외과를 방문해 상담을 받고 수술해주기로 한 의사 대신 마취가 시작되면 다른 의사가 들어와 수술하는 방식을 가리킨다. 유명 의사가 모두를 수술해줄 물리적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나타난 방식이다. 권 씨 사망 사건은 수술실에 폐쇄회로(CC)TV를 의무화하는 일명 ‘권대희법’ 발의로 이어지기도 했다.
2017년 권 씨 가족은 소송에 돌입했다. 이 사건은 의료사고 특성상 수사가 길어졌다. 각 병원에 수술 기록 등을 감정 받는 데 시간이 걸리는 데다 병원들이 협조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2019년 11월이 돼서야 기소가 됐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몇몇 가지 혐의는 기소되지 않았다.
국회 앞 1인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이나금 환자권익연구소 소장. 사진=권태훈 씨 제공
권대희 씨 형 태훈 씨는 “의사들이 두려워한 건 과실치사가 아닌 의료법 위반이다. 과실치사는 집행유예면 그만이지만 의료법 위반은 의사 면허가 정지되기 때문”라면서 “이 사건 때문에 법조계를 드나들며 ‘검사는 구속으로 명성을 얻고 불기소로 돈을 번다’라는 말을 들었는데 그게 사실이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이 일을 청와대 청원, 오마이뉴스 등에 글을 올렸고, 이 외침이 점점 공론화되기 시작했다.
2019년 12월 검찰의 불기소에 불복하고 유족들은 항고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2020년 2월 이에 가족들은 서울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접수했다. 재정신청은 검찰이 기소하지 않아서 재판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볼 수도 없게 된 죄목에 대해 법원이 강제로 재판에 올려달라고 신청하는 제도다.
재정신청은 인용률이 극히 적다. 법조계 관록이 깊은 서초동 변호사는 “변호사 중에서도 재정신청 인용을 경험해보지 못한 경우가 태반일 것”이라고 말했다. 2019년 재정신청이 접수된 3만 2978건 가운데 107건만이 인용돼 인용률 0.32%에 불과하다.
재정신청이 접수되고 2020년 6월 MBC ‘PD수첩’ 등에서 검사와 해당 의사가 대학 동기로 각별한 사이임이 밝혀지면서 국민적 공분을 샀다. 당시 수사 검사의 이름이 포털 실시간 검색어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 때문이었을까. 2020년 10월 0.32%의 좁은 문을 뚫고 재정신청을 인용하면서 법원이 검찰의 판단이 잘못됐음을 확인해줬다. 유족들 주변에서는 “기적 같은 일”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법원이 재정신청을 인용했기 때문에 2020년 10월 28일 검찰은 권대희 씨를 수술한 성형외과 원장과 유령수술을 한 의사, 간호조무사 등을 무면허의료행위 공동정범으로 기소했다. 하지만 유족들은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유족들은 “의사는 권대희 씨를 수술방에 두고 그대로 나가면 죽을 걸 알면서도 나갔고 간호조무사의 성의 없는 지혈만이 있었을 뿐이다. 이는 의료사고가 발생해도 의사들은 통상 형사처벌을 받지 않음을 알기에, 혹 형을 받더라도 집행유예가 나오는 과실치사죄가 적용될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이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상해치사다”라고 말했다.
지난 4월 권대희 씨 유가족은 검찰총장 면담을 신청했다. 여기에 조남관 검찰총장 직무대행이 면담 요청에 응하면서 만남이 성사됐다. 피해 당사자들이 면담을 신청하는 건 가능하지만 실제 면담이 이뤄지는 건 극히 이례적인 경우다. 권대희 씨 형인 태훈 씨는 “이날 만남에서 조남관 직무대행은 상해치사로 공소장을 변경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얘기를 차분하게 들어줬다”면서 “이 자리에서 조 직무대행은 ‘국민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검찰이 돼야 한다’, ‘취지에 공감하고, 공소장 변경을 신중하게 검토하겠다’ 등의 말을 했다”고 전했다.
기적 같은 재정신청을 통해 의료법 위반 혐의 기소를 만들어냈고, 이례적인 검찰총장 면담까지 이뤄낸 이들 가족이 또 한 번 역사적인 순간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 주목되고 있다. 권태훈 씨는 “유령수술에 대한 상해치사가 적용된다면 아마 첫 번째 사례로 알고 있다. 상해치사가 되면 처벌 수위가 훨씬 높아진다”면서 “CCTV 상으로는 명백한 만큼 상해치사를 꼭 적용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조남관 검찰총장 직무대행이 권대희 씨 유족들을 만나 공소장 변경을 신중하게 검토하겠다고 전했다. 사진=KBS 뉴스 캡처
한편 2021년 3월 권대희 씨 어머니인 이나금 씨는 환자권익연구소를 설립했다. 소송 과정에서 의료 정책이 논의되고 만들어지는 과정이 의사 편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권태훈 씨는 “피해 유족의 외마디 외침을 넘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의견을 적극 개진하고자 단체를 만들었다”고 설립 이유를 밝혔다.
환자권익연구소는 최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수술실 안에 CCTV를 달자는 정책을 공약으로 해달라고 출마한 후보들에게 요청했다. 환자권익연구소 측은 “앞으로도 속출하는 의료사고 피해자들과 연대해 그들의 억울함을 알리고, 소송 과정에서 얻은 경험을 나누겠다”며 “있어선 안 되는 일을 벌이고 있는 일부 의료계 일탈 의사들을 벌하고 법과 제도, 판례를 바꾸어 나가겠다”고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밝혔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