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장수 총리 ‘정인숙 스캔들’ 구설도
▲ 1976년 동남아 4개국 순방길에 오른 정일권 국회의장이 출영 인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
이때 서울 시민들은 숨어서 듣는 라디오 단파방송을 통해 미국이 참전한다는 것, 그리고 유엔이 한국수호를 결의한 것을 듣고 희망을 가졌고, 그런 와중에 채병덕 소장이 육군참모총장에서 경질되고 미국에서 막 귀국한 정일권 준장이 소장 진급과 동시에 육군참모총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정일권은 1917년 11월 함경북도 경원에서 태어났고 1994년 1월 미국 하와이에서 작고했다. 정일권 대장이 함경도 출신이라 그랬는지 군내에서 함경도 출신은 그를 중심으로 ‘아라스카’라고 불렸다.
정일권은 일본이 세운 만주의 봉천군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군 대위로 복무했다. 일제가 패망하고 해방된 후에는 미국군정이 세운 군사영어학교(원용덕 교장) 1기생 중 1차로 1946년 1월 15일에 임관하여 국방경비대(대한민국 정부수립후 육군이 됨) 4연대장 겸 총참모장을 역임했다. 국군건국에 중추요원으로 앞장선 것이다. 참고로 친일 인명사전에 일본군과 만주군 소위 이상은 수록된다는 보도가 있었다고 필자가 전하니 일본 게이오대학의 오코노기 법학부장은 “그분들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한국은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 역사 평가는 그렇게 다른 것이다.
정일권은 1948년 10월 여순반란 진압 후 지리산전투 사령관으로 무장 유격대를 섬멸함으로써 이승만 박사의 신임을 얻게 됐다. 정일권은 이승만 대통령을 보필하면서 육군본부 전방지휘소를 오가는 등 미군작전지휘 하에 있는 한국군을 지원, 독전했다. 북진한 육군부대의 후퇴가 심할 때 분대장 이상의 모든 지휘관에 명령 없이 후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직결처분령을 내린 것은 그 당시 전선에 근무하던 일선 장병들은 지금도 기억할 것이다. 필자도 그 명령을 하달받았다. 그것은 정일권 참모총장을 통해 나온 것이다.
1950년 7월 말 장도영과 강문봉이 박정희 문관의 복직을 추천했을 때 정일권은 박정희 문관을 흔쾌히 현역 소령으로 복귀시켰다. 그때 정 총장이 부결했으면 한국의 역사는 아마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정일권은 곧 이종찬 장군에게 참모총장 자리를 넘기고 일선 지휘관 경험을 쌓기 위해 참모총장을 지낸 장군이지만 보병 2사단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정일권은 그때 군 생활을 접으려고 했는데 백선엽 대장이 만류했다는 후문이다. 정일권은 2사단장을 경험하고 곧 미9군단 부군단장으로 옮겨가 또 다른 경험을 쌓는다. 그리고는 미국 캔자스주 포인트 리벤워스 참모대학을 수학했다. 1953년 6월 귀국한 정일권은 중부전선의 한국군 2군단장으로서 휴전 직전의 중공군 총 공세에 맞서 테일러 8군사령관의 작전인 금성전투 등에서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1954년 2월 백선엽 대장의 뒤를 이어 두 번째로 육군참모총장이 됐다.
1954년에는 휴전 직후라 서울의 8군 사령부에서 매월 군단장회의가 있어 필자는 장도영 2군 단장을 수행해서 정일권 참모총장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마침 1951년 초 6사단 작전처 소속으로 사창리 전투에서 부상당할 때까지 같이 있던 신성재가 정 참모총장의 수행부관으로 을지로 1가의 집에서부터 수행하고 다녀 친밀감을 느꼈다. 정 참모총장은 온화하면서도 위엄이 있고 겸손하면서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밑의 사람들을 감싸 안는 타입으로 2군단장 장도영, 5군단장 최영희, 6군단장 이한림 등이 정 총장을 따랐다. 정 총장은 장도영 군단장에게도 자주 전화를 걸어왔다. 그의 리더십은 빛나 보였다. 그때는 지금의 파이낸셜센터(시청역 부근) 자리에 소방서가 있었는데 그 앞에서 6·25 전쟁 후 처음으로 이승만 박사를 모시고 열병식을 열기도 했다. 열병식이 끝나자 예정에 없던 한미지휘관을 위한 이승만 대통령의 리셉션이 구 조선호텔에서 있었다. 전부 전투복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참석했다. 이때 군단장들은 지프차인데 정일권 총장만 미8군에서 제공받은 황토색 군용세단을 이용했다.
정일권은 1961년 5·16이 나자 2년 동안 주미대사를 지내고 귀국했다. 1963년 말 국무총리는 최두선, 정일권은 외무장관으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최두선 내각은 5개월 만에 물러나고 곧 정일권은 국무총리에 취임해선 무려 6년간 총리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총리직 수행이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1966년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졌을 때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으로부터 오물투척을 당하는 고초를 당했고 그 사건은 미국의 <타임>지에도 크게 보도됐다.
1966년 필자가 주 유엔대표부에 있을 때 정일권 총리가 이후락 청와대 비서실장과 함께 워싱턴을 거쳐 뉴욕으로 와서 만났다. 미국 조야에서 정일권 총리만 환대해서 그런지 이후락 실장이 기분이 나빠 주위 사람들에게 마구 신경질을 부렸던 모습이 생각난다. 정일권 총리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의전을 수행했다. 마침 롱아일랜드 대학교에서 정일권 총리에 대한 명예박사학위 수여식이 있어 배석하고 케네디공항 출발 때까지 수행하고 전송을 했다. 대사는 그때 김용식이었다. 정일권이 박 대통령 밑에서 그렇게 오래 흔들림 없이 견디는 것은 굉장한 처세술 덕분이었다. 덕장, 지장, 용장을 모두 겸비한 듯했다. 그리고 그걸 즐길 줄도 알았다.
▲ 왼쪽부터 필자, 밴플리트 장군, 정일권 총리. |
이때는 안보와 경제가 약할 때라 청와대가 미국 조야에 영향력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시기였다. 한미문화 자유재단 박보희가 국위선양을 위해 모금을 하는데 1달러 이상 기부한 6만 명에게 대통령의 회신을 보내기로 건의하여 청와대 비서실에 우체국 직원이 와서 우표를 붙여 1만 톤가량 보내고 있었다. 미국에서 여러 채널로 항의가 들어왔지만 박종규에 의해 묵살되었다. 어느 토요일 박 대통령이 서울 컨트리클럽으로 골프를 치러 나갔을 때였다. 정일권 총리가 국무성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곧 서울 컨트리클럽에 가서 보고를 하고 “그 일을 중단시키라”는 지시를 받은 적이 있다. 박종규도 정 총리의 말을 듣고는 중단시켰다. 그만큼 정 총리의 말은 무게가 있었다. 지금 같으면 우스운 이야기이지만 그때는 지금처럼 여러 단체에 몇 억씩, 몇 십억씩 보조를 줄 수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안하무인인 박종규도 정일권 총리에게는 깍듯이 예의를 지켰다.
또 한 번은 정인숙 피살 사건 때 정 총리는 많은 오해를 받아 세간의 입에 올랐고 박 대통령에게 가서 이실직고를 해야 했다. 그 후 정인숙의 오빠와 아들 정성일(친자확인 요구)에게 시달렸지만 끝까지 거절했다. 박동선 사건, 김옥선 제명사건, 유신언론 통제법 강행 처리가 정일권의 역사에 남아 있다. 과거 군에 있을 때도 국민방위군사건 재판에서 김석원(장군)에 의한 책임 공격은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1970년 총리직을 사임하고 민주 공화당 상임고문을 맡았고 1971년에는 전국구 의원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72년에는 민주 공화당 의장서리가 됐다. 재선을 거쳐 1973년에는 국회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정일권은 1974년 8·15 경축식 때 국립극장 행사 중 육영수 영부인이 문세광에 의해 저격당할 때 그 옆에 국회의장으로 앉아 있었다. 그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이어서 1979년 박정희대통령 서거 후 김종필이 공화당 의장을 맡고 있을 때 이후락이 공화당 당사에 와서 폭탄선언을 해 파장을 일으켰다. 이 위기에서 김종필이 제일 먼저 찾은 사람이 정일권(당시 공화당 상임고문)이었다. 하지만 도움은 되지 않았고, 정국은 신군부의 장악으로 흘러갔고 그 후 전두환 정부가 들어선 후 국정자문 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그동안 정일권 주변에서 인연을 맺었던 사람은 모두 평생을 따라다니고 어떤 형태이던 기용되었다. 군에서 같이 있던 부하동료, 하버드대, 옥스퍼드대 등에 있을 때 학자와 학생, 주미대사관 시절 대사관 직원이나 학생들이 중심이 됐다(홍성철, 김선길, 양윤세, 박정수, 이번준 등). 한때 청와대 경호실에서 그 배경을 내사한 일도 있었다.
정일권은 시국을 꿰뚫고 정계 원로로서, 군의 원로로서 조용한 생활을 지내다가 1994년 하와이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군인으로 시작하여 외교관, 정치인이 되면서 각 분야의 요직을 두루 거친 우리나라가 필요로 하는 원로였다.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묵직하게 대처할 수 있는 지도자였던 것이다. 국무총리 6년 7개월, 입법부의 수장인 국회의장을 6년 동안이나 역임했다. ‘대통령직만 빼고 다했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였다. 그러나 정일권은 역시 개전초기 육해공군총사령관으로서 풍전등화 같은 운명에 놓여있는 한국을 방어하기 위해 철모를 쓰고, 수류탄을 어깨에 달고, 정신없이 군을 지휘하던 구국의 장수로 더 기억된다.
전 IOC 수석부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