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턱 밑까지 ‘폭풍로비’
▲ 구석구석 ‘돈폭탄’ 함바집 브로커 유상봉 씨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강희락 전 경찰청장(왼쪽)과 이길범 전 해양경찰청장. 이외에도 검찰이 확보한 유 씨의 ‘로비 수첩’엔 정·관계 인사 1000여 명의 직책과 이름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건설현장 식당(함바) 운영권 비리 사건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경찰 최고위직을 지낸 강희락 전 경찰청장과 이길범 전 해양경찰청장이 이미 검찰 조사를 받은 데 이어 고위공직자와 정·관계 인사들의 실명이 속속 거론되고 있기 때문이다. 검찰이 확보한 브로커 유상봉 씨(구속)의 ‘로비 수첩’에는 치안감급 이상 경찰 고위 간부 외에 전·현직 국회의원과 전직 장·차관, 광역단체장, 공기업 임원 등 정·관계 유력 인사 1000여 명이 적시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함바 비리 사건이 대형 게이트로 확전될 조짐이 일면서 이른바 ‘유상봉 리스트’가 태풍의 눈으로 부상하고 있는 형국이다. 특히 이 리스트에는 현 정부 실세그룹으로 통하는 ‘S라인’(서울시청 출신)을 비롯한 일부 여권 실세들과 여야를 망라한 거물급 정치인들의 이름도 오르내리고 있는 실정이다. 사정당국 주변에선 ‘유 리스트’가 정·관계 인사들의 ‘데스노트’ 역할을 할 경우 제2의 ‘박연차 게이트’ 사건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신년 벽두부터 정국을 뒤흔드는 메가톤급 뇌관으로 부상한 ‘유상봉 리스트’의 실체를 들여다봤다.
‘유상봉 리스트’의 발원지는 다름아닌 브로커 유 씨가 기록한 로비 수첩이다. 검찰이 확보한 이 수첩에는 로비 대상자로 추정되는 정·관계 유력인사 1000여 명의 직책과 이름, 전화번호 등이 자세히 기록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수첩에 기록된 인사들을 대상으로 유 씨의 진술 및 여러 정황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조사 및 사법처리 대상자를 선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유 리스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사는 전·현직 경찰 수뇌부다. 이미 강희락·이길범 전 청장이 검찰 조사를 받았고, 치안감 이상 고위 간부들 상당수가 리스트에 올라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강 전 청장은 경찰청장 재임시절인 2009년 유 씨로부터 경찰 승진인사 청탁과 함께 모두 1억여 원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또 유 씨에게 해외도피를 권유하는 등 증거인멸 혐의도 받고 있다. 검찰은 강 전 청장을 상대로 사전구속영장을 신청했으나 법원은 1월 13일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없다’며 이를 기각됐다. 이 전 해경청장은 유 씨로부터 ‘인천 송도지역 아파트 공사 현장의 식당 운영권을 따게 해달라’는 청탁과 함께 해경 격려금 등 각종 명목으로 3500만 원을 수수한 혐의로 1월 12일 검찰 조사를 받았다.
사태가 확산되자 조현오 경찰청장은 유 씨와 연락했거나 만난 경찰 간부들은 자진 신고하라는 지시까지 내린 상태다. 경찰청에 따르면 전국 560여 명에 이르는 총경급 이상 고위 경찰관 가운데 유 씨를 만나거나 접촉한 사실이 있다고 신고한 간부는 41명에 이른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간부들 대부분은 윗선의 소개로 유 씨와 관계를 맺은 것으로 드러나 ‘스폰서 경찰’이란 또다른 논란을 야기하고 있다.
검찰은 유 씨로부터 돈을 수수한 정황이 포착된 박기륜 전 치안감, 김병철 울산지방경찰청장, 양성철 광주지방경찰청장 등 전·현직 경찰 고위간부들을 조만간 줄소환한다는 방침이다. 여기에 본인들은 부인하고 있지만 박일만 전 부산청장과 박영진 전 경남청장, 김중확 전 부산청장, 이동선 전 치안감 등의 이름도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는 형국이다.
전·현직 국회의원과 전직 장·차관, 광역단체장, 공기업 전·현직 임원 등 정·관계 인사 30여 명도 ‘유 리스트’로 거론되고 있다.
‘함바 비리’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서울동부지검 형사6부는 “현직 광역자치단체장을 비롯해 전·현직 국회의원, 전직 장·차관, 차관급 기관장, 전·현직 공기업 임원 등에게도 수천만 원에서 수 억 원에 이르는 금품을 전달했다”는 유 씨의 진술을 확보하고 구체적인 증거를 수집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검찰은 특히 유 씨가 정치권에 ‘보험성’ 후원금을 낸 사실에 주목하고 대가성 여부를 파악하는 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
실제로 유 씨는 한나라당 이군현 의원과 민주당 조영택 의원에게 후원금을 건넸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의원은 금품수수 사실을 전면 부인하고 있고, 조 의원은 500만 원의 후원금을 받았지만 대가성은 없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 씨로부터 후원금 명목 등으로 금품을 수수한 혐의를 받고 있는 국회 국토해양위원회 소속 의원 2~3명도 검찰 수사선상에 올라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친이계 핵심인 정두언 한나라당 최고위원과 허남식 부산광역시장은 유 씨와 접촉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정 최고위원은 “2003년 서울시 정무부시장 시절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사람의 부탁으로 유 씨를 만난 적이 있다”고 전제한 뒤 “브로커라는 느낌이 너무 강하게 들어 다시는 보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허 시장도 “지인의 소개로 유 씨를 두세 차례 만난 적이 있다”면서도 “그 지인도 프라이버시가 있으니까 누구인지는 밝힐 수 없다”고 말했다.
현직 차관급 기관장인 A 씨는 2008년 유 씨로부터 각종 이권 청탁과 함께 2500만 원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요직을 두루 거친 A 씨는 “유 씨를 알고 지낸 것은 맞지만 돈을 주고받은 적은 없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고 있다. 또 L 전 장관과 M 전 차관, 현역 공기업 사장인 C 씨, 전 공기업 사장 J 씨 등도 유 씨로부터 로비를 받은 정황이 포착돼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다.
현 정부 실세그룹으로 통하는 ‘S라인’도 검찰 수사선상에 올라 있다. S라인의 핵심으로 청와대 내부 감찰을 주도해온 배건기 전 청와대 민정수석실 감찰팀장이 ‘함바 비리’ 사건에 연루된 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유 씨는 조사에서 “2009년 배 팀장에게 식당 운영권을 확보하는 데 도움을 달라는 청탁과 함께 수천만 원을 건넸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배 전 팀장은 이 같은 의혹이 외부에 알려진 지난 9일 청와대에 사직서를 제출했고, 검찰은 조만간 배 전 팀장을 소환해 관련 의혹에 대해 조사할 방침이다. 청와대 감찰팀장이었던 배 전 팀장은 선임행정관급으로는 드물게 대통령에게 직보할 정도로 두터운 신뢰를 받아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배 전 팀장이 2009년 3월 청와대 행정관 ‘성접대’ 사건이 불거졌을 당시 외부 사정기관의 협조까지 받아 400여 명에 달하는 청와대 직원들을 뒷조사하는 ‘100일 특별감찰’의 책임자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청와대 내에서 그의 입지를 방증하고 있다. 이 대통령의 신임과 청와대 내에서의 입지를 감안할 때 그동안 배 전 팀장은 인사청탁 등 집중적인 로비 대상이 됐을 가능성에 힘이 실리고 있다.
특히 유 씨의 로비 행태가 경찰 쪽 인맥을 중심으로 로비 대상을 확장해 나갔다는 점에 미뤄 경찰 출신인 배 전 팀장의 주선으로 또 다른 청와대 인사나 여권 실세가 유 씨와 접촉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다. 박지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청와대 감찰팀장은 민정수석 산하에서 모든 감찰 업무를 장악한다”며 “이런 인사가 ‘함바 게이트’와 관련해 검찰에 출두하고 사표를 낸다고 하면 이것은 권력형 비리”라고 압박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일부 여권 실세와 차기 대권주자 등 거물급 정치인의 이름이 리스트에 오르내리고 있는 형국이다. 실제로 유 씨를 사기 혐의로 고소한 장 아무개 씨는 1월 11일 “지난해 초 유 씨의 2차 브로커가 유 씨의 처남인 김 아무개 씨의 지시로 여권 실세인 B 씨 측근에게 현금 1억 원을 전달했다”고 주장해 파문을 예고하고 있다. 김 씨가 2차 브로커에게 1억 원짜리 수표 1장을 줬고, 2차 브로커는 이를 현금으로 바꿔 청와대 인근 찻집에서 B 씨의 측근에게 건네줬다는 것이 장 씨의 주장이다. 당시 업계 주변에서도 유 씨가 B 씨 측에 거액의 돈을 건넸다는 소문이 설득력 있게 나돌았다고 한다.
사정당국 일각에서는 ‘함바 비리’ 사건에 차기 대권주자도 연루됐다는 의혹과 함께 유 씨에게 강 전 청장을 비롯한 전·현직 경찰 고위인사를 소개해준 거물급 인사가 따로 있을 것이란 소문도 무성히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여기에 호남 출신인 유 씨가 구 정권 때 업계의 큰손으로 입지를 구축했다는 점에서 구 여권 실세들이 배후라는 의혹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있는 형국이다. ‘유 리스트’로 거론되고 있는 인사들 중 상당수가 ‘지인의 소개나 거부할 수 없는 윗선의 부탁으로 유 씨를 만났다’고 진술하고 있다는 점도 ‘거물급 배후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신년 벽두부터 정·관계를 뒤흔드는 핵뇌관으로 부상한 ‘유상봉 리스트’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또 수백억대에 달하는 돈을 정·관계 로비자금으로 사용한 유 씨의 ‘통 큰’ 로비를 지원한 거물급 배후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경찰 수뇌부를 넘어 정치권과 청와대로 향하고 있는 검찰의 사정 칼날에 국민적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