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니지 ‘홈런 타자’ 야구단 ‘세 타석’째 도전
▲ 엔씨소프트 김택진 사장이 2009년 12월 10일 서울 신라호텔에서 열린 ‘언스트앤영 최우수 기업가상’ 시상식에서 엔터테인먼트 부문을 수상했다. 연합뉴스 |
키가 작았지만 운동신경이 좋았던 김 대표는 초등학교 시절 육상선수로 활약했다. 학교에서 달리기 대회를 하면 항상 1등이었고 학교 대표로 지역대회에 출전해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그래서 원래 그의 꿈은 운동선수였다. 그런 그가 우연찮게 당시 세계 최초의 PC인 애플 컴퓨터를 접하며 인생이 뒤바뀐다. 원래부터 호기심 많고 기계에 몰두했던 김 대표에게 컴퓨터는 ‘꿈의 기계’였다. 게다가 컴퓨터 게임에 푹 빠지면서 운동선수가 목표였던 그의 꿈이 바뀌었다. 자신도 이런 멋진 게임을 제작하고 싶다는 생각을 이때부터 하게 된다.
운동만큼이나 공부도 잘했던 김 대표는 지난 1985년 서울대학교 전자공학과에 입학한다. 당시 우리나라는 반도체에 본격적으로 투자하는 단계라 전자공학과 학생들은 대기업에 들어가 반도체 연구원이 되는 게 목표였다. 그렇지만 김 대표는 달랐다. 그는 반도체보다는 소프트웨어 같은 프로그램에 관심이 많았다.
컴퓨터 언어 공부를 통해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만들다 보니 자연스레 ‘서울대 컴퓨터 연구 동아리’(SCSC)에 가입하게 됐고 자신만큼 많은 사람들이 소프트웨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소프트웨어에 몰두한 김 대표는 당시 학교 선배였던 이찬진 드림위즈 대표를 만난다. 이찬진 대표는 김 대표의 재능을 높게 평가해 워드프로세서 ‘아래아 한글’을 같이 개발하게 되는데 당시 김 대표가 맡았던 일은 한글 타자 프로그램인 ‘한메타자’와 타자연습과 게임이 결합된 ‘베네치아’였다. 한글 개발에 이어 유닉스에 빠진 김 대표는 ‘머드’(MUD)란 인터넷 텍스트 게임의 존재를 알게 된다. ‘로그’와 ‘넷핵’이란 게임을 통해 전 세계 수많은 유저들과 게임을 즐기는 것에 매료된 그는 훗날 자신도 이런 게임을 개발하고 싶다는 새로운 꿈을 품는다.
대학교에서 한글 개발에 참여하고 다양한 경험을 쌓았던 김 대표는 1990년 대학 졸업 후 바로 현대전자에 입사한다. 취업보다는 공부를 더 하고 싶었지만 넉넉지 않은 가정환경에 현대전자가 병역특례를 약속하면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것이다. 입사 다음해 미국으로 연수를 간 김 대표는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당시 미국에서 꿈틀대던 인터넷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케텔(하이텔) 천리안 나우누리’ 같은 국내 PC통신망만 접하다 전 세계로 연결된 인터넷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인터넷에 대한 충격이 채 가시지도 않은 채 한국으로 들어온 그는 2년 가까운 노력 끝에 대한민국 최초의 인터넷 온라인 서비스 ‘아미넷’(현 신비로)을 개발했다. 이로 인해 김 대표는 회사 내에서 크게 인정을 받고 마이크로소프트가 한 국가에 한두 명밖에 주지 않는 ‘MS 리저널 디렉터’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당시 전자회사로 발돋움하기 위해 그룹 역량을 쏟아붓고 있던 현대그룹이 아미넷의 주도권을 놓고 계열사끼리 경쟁하면서 자신의 한계와 대기업의 정치싸움에 염증을 느껴 회사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현대전자 동료들과 사표를 내고 회사를 차렸지만 자금이 없었던 김 대표는 막막했다. 넥스트 컴퍼니(Next Company)의 약자인 ‘NC소프트’란 거창한 이름으로 회사를 차렸지만 금방 회사 자금이 동이 났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그는 당시 자신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던 신혼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회사를 운영한다.
이러한 와중에 SK가 김 대표에게 아미넷 같은 인터넷 서비스를 만들어 달라고 제안을 하고 엔씨소프트는 ‘네츠고’(현 네이트온)를 성공리에 론칭시킨다.
네츠고가 성공하자 다른 기업들도 자사의 인터넷 서비스 또는 인트라넷을 구축해달라는 요청이 쇄도하면서 엔씨소프트는 솔루션 회사로서 안정적 기반을 닦았다. 그렇지만 그는 대학 시절에 알게 됐던 머드게임의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남의 회사의 수주를 받아 제품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회사가 성장하려면 국내뿐 아니라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즐기는 인터넷 게임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는 와중에 송재경 넥슨 부사장(현 XL게임즈 대표)이 프로젝트 ‘넷핵’(현 리니지)이란 게임을 들고 엔씨소프트를 찾아왔다. 송 부사장을 따듯하게 반긴 김 대표는 넷핵의 프로젝트 명을 없애고 신일숙 화백의 만화와 동명인 ‘리니지’란 이름을 사용했다. 회사도 게임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이런 김 대표를 두고 주변에서는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했다. 대기업 수주를 받아 안정적으로 회사를 운영할 수 있는데 웬 게임 사업이냐며 회사를 떠나는 사람도 있었다.
리니지 매출 증가세는 가히 폭발적이었다. 첫 해 3개월에 2억 원에서 이듬해 같은 시기에는 30억 원으로 뛰었다. 첫해 1000명의 동시접속자는 그 다음해 10만 명으로 100배 이상 늘어났다. 말 그대로 초대박이었다. 이때부터 “김택진이 도대체 누구냐”, “엔씨소프트가 어떤 회사냐”는 문의가 폭주했다. 1999년에 홍보팀장으로 입사해 여전히 엔씨소프트 홍보실에서 근무하는 김주영 부장은 “전화 문의가 폭주하고 인터뷰 약속에 쇄도해 정신이 없었다. 회사의 성장세가 느껴졌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코스닥에 상장하고 연 매출 1000억 원을 넘기며 승승장구하던 2001년 2월, 김 대표에게 큰 위기가 닥친다. 게임 리니지의 원작 만화가인 신일숙 화백이 엔씨소프트를 상대로 게임의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이다. 게다가 신일숙 화백은 단순히 가처분 신청을 내는 수준이 아니라 당시 가장 큰 게임업체인 ‘디지털드림스튜디오’와 함께 리니지 관련 게임, 애니메이션, 캐릭터 개발 등 다양한 사업제휴까지 같이 발표했다.
리니지 매출이 전부였던 엔씨소프트에게 리니지 사용금지 가처분 신청은 회사를 그냥 문 닫으라는 소리와 같았다. 신일숙 화백이 엔씨소프트에 이렇게까지 가혹한 소송을 건 배경은 이렇다. 리니지 개발 초기에 엔씨소프트는 신일숙 화백과 리니지에 대한 로열티 계약을 맺었는데 매출의 일부분을 매월 또는 매년 지급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리니지 상용화를 앞두고 김 대표와 신 화백은 재계약을 통해 리니지에 대한 개런티 지급을 매달 매출의 일정 금액을 지급하는 방법에서 1500만 원 일괄지급으로 바꾸었다. 당시 상용화를 진행 중인 바람의 나라 월 매출이 수천만 원 수준이었기 때문에 신일숙 화백도 이 계약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지만 엔씨소프트가 연매출 1000억 원을 기록하자 신 화백의 생각이 바뀐 것이다. 결국 이 송사는 엔씨소프트가 신 화백에게 10억 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이 사건은 김 대표에게 리니지 말고 다른 게임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다. 이후 해외로 눈을 돌린 김 대표는 리니지를 중국과 대만 등에 수출하는데, 이 역시 대박이 났다. 특히 대만에서는 리니지의 인기로 인해 대만 전체 인터넷이 중단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아시아에서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리니지를 가지고 미국에 도착한 김 대표는 그러나 지금까지 느껴 보지 못한 좌절감을 맛봐야 했다. 유통이 중요한 미국 시장에서 무명이나 다름없는 엔씨소프트를 배급해줄 업체를 찾기도 힘들었고 어렵게 선보인 리니지에 대한 현지 매체의 혹평이 이어졌다. 이러한 좌절감은 그에게 더욱 도전정신을 불러일으켰다.
무명의 엔씨소프트를 알리기 위한 특단의 조치를 찾는 와중에 세계 3대 게임 개발자로 유명한 리처드 게리엇(Richard Allen Garriott)이 자신의 팀을 데리고 새로 입사할 회사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주저 없이 그를 회사로 불러들였다. 리처드 게리엇을 영입하는 데 그는 회사 연간 매출의 절반인 500억 원을 지급했다. 당연히 엔씨소프트 주식은 폭락했고 투자자들은 난리를 쳤다. 그러나 엔씨소프트의 브랜드 가치는 올라갔고 유명 인재와 인기 게임을 영입하는 게 쉬워졌다. 당시 리처드 게리엇 영입을 통해 엔씨소프트는 ‘길드워’와 ‘씨티오브히어로즈’ 같은, 미국 업체들이 탐내던 게임들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후 엔씨소프트는 미국에서도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는다.
엔씨소프트에서 김택진 이상으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윤송이 부사장이다. 윤 부사장은 1996년 KAIST를 수석 졸업하고 2000년 ‘24년 2개월’이란 나이에 미국 MIT 대학원 미디어랩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컨설팅회사 매킨지, SK그룹 계열사 와이더댄닷컴을 거쳐 2004년 28세로 SK텔레콤 최연소 임원에 올랐다. 당대 최고의 ‘천재소녀’와 김 대표는 지난 2007년 11월에 결혼, 다시 한 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두 명의 천재가 가정을 꾸렸으니 그들의 2세들은 천재 중에 천재일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얘기했을 정도다.
김 대표와 엔씨소프트가 최근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까닭은 창원을 연고지로 한 프로야구 9구단 창단에 힘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 대표의 야구단 창단 시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가을 바쁜 일정을 쪼개 인천 문학구장에서 열린 한국시리즈를 직접 관전할 정도로 야구광인 그는 2000년대 초반 해태 타이거즈(현 KIA 타이거즈)가 야구단을 다른 기업에 양도하려 할 때 인수를 추진했으며,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고 히어로즈가 창단되는 과정에서 도 구단 인수를 직접 추진하기도 했다.
벌써 세 번째 도전인 프로야구단 창단 시도는 “사회적 인식이 미비한 게임 기업을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겠다”는 그의 평소 의지가 잘 반영된 경영방침 중 하나다. 여러 위기를 극복하고 게임 성공 신화를 일군 그가 야구단 창단이라는 새로운 꿈도 현실화할 수 있을까.
김성태 게임샷 편집장 www.gameshot.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