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김응용 감독 권유로 모교 강사 생활…“나 역시 추신수에게 17번 양보했을 것”
지난 2일 부산에서 채태인을 만났다. 은퇴 후 모교인 개성고(이전 부산상고)에서 야구 강사로 활약 중인 채태인은 다양한 별명과 재미있는 제스처로 팬들에게 웃음을 안겼던 자신을 향해 야구 ‘바보’와 ‘천재’를 오간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라고 소개한다.
#야구 강사로 ‘제2의 인생’
은퇴 후 채태인은 개성고 선배이자 자신을 보스턴 레드삭스로 보낸 김응용 전 감독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모교로 가서 후배들을 도와주라는 내용이었다. 채태인은 은사의 조언을 외면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해서 시작한 일이 야구 강사다.
“야구부에 감독, 코치님이 계시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다. 야구 기술보다는 후배들에게 멘탈 관련 도움을 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선수들한테 강사보다는 선배로 다가가는 편이다. 선수들이 경기할 때 집중해서 재미있게 플레이하듯 훈련도 재미있게 하기를 바란다. 아무 생각 없이 훈련을 반복하는 건 야구가 아니라 노동이기 때문이다. 내가 했던 야구가 정답은 아니겠지만 프로에서 오랫동안 활약했던 선수라 그 경험을 모두 전달해주고 싶은데 내 역할에 한계가 있어 아쉬움도 있다.”
채태인은 한화 이글스의 카를로스 수베로 감독이 강조한 ‘실패할 자유’를 모교 후배들에게 강조한다고 말했다.
“프로 선수들도 실패를 하는데 아마추어인 고교 선수들이 실패할 확률은 더 높지 않겠나. 프로는 실패하면 짐 싸서 나가야 하지만 고교 선수들은 실패를 통해 성장할 수 있는 터라 실패를 충분히 해보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런 점에서 수베로 감독님이 말한 ‘실패할 자유’는 어린 선수들에게 큰 울림을 주는 메시지다.”
모교 후배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을 통해 자신도 또 다른 배움을 갖게 된다고 말하는 채태인에게 프로팀 지도자에 대한 관심 유무를 물으니 즉답이 나온다.
“누가 나처럼 말 잘 안 듣고 제 멋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코치로 쓰겠나.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 ‘먹튀’
채태인은 2001년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계약금 80만 달러(약 8억 9000만 원)를 받고 미국 진출에 성공한다.
“당시 어깨가 좋지 않았는데 미국 진출을 강행했다. 입단 초 플로리다 캠프에서 훈련하다 어깨 부상이 악화돼 보스턴에서 수술을 받았다. 어깨 부상으로 단 한 차례도 마운드에 오르지 못하고 돌아온 바람에 ‘먹튀’라고 비난도 받았고, ‘어학연수’ 다녀왔느냐고 조롱하는 소리도 들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 또한 사실이었기 때문에 받아들여야만 했다.”
2002년 7월에 귀국한 채태인은 2003년 사회복무요원으로 군복무를 대신했다. 보스턴에서 방출된 줄 알고 KBO리그 입단을 알아보다가 서류상으로 여전히 보스턴 소속 선수라는 걸 알고 자신을 데려온 스카우트를 만나기 위해 호주를 찾아갔다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통역이 없어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구단과 맺은 계약 내용을 내가 다르게 해석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단은 병역 의무를 마쳤으니 팀에 합류하라고 했고, 난 더 이상 미국에서 야구 할 자신이 없었다. 존 디블이란 보스턴 스카우트가 호주 야구대표팀 감독을 겸했는데 그 분을 만나야 내 신분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호주까지 찾아갔다. 그분은 나를 타일러 미국으로 돌려보내려 했는데 내가 간절히 부탁드렸다. 한국에서 야구하고 싶으니 제발 좀 풀어 달라고 말이다.”
그렇게 해서 임의탈퇴 신분이 된 채태인은 KBO가 1999년 1월 1일 이후 해외에 진출해 5년 이상 경과된 선수가 국내 복귀할 경우 2년의 유예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규약을 한시적으로 없애는 특별규정을 만든 덕분에 KBO리그에서 뛸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 당시 송승준, 최희섭, 김병현, 추신수, 채태인, 이승학, 류제국이 대상 선수였는데 채태인은 삼성 유니폼을 입게 됐다.
#김응용 전 감독과의 인연
채태인과 김응용 전 감독과의 인연은 모교인 개성고에서 시작된다. 채태인이 개성고 2학년 때 당시 해태(현 KIA) 타이거즈 감독을 맡고 있던 김 전 감독이 자신의 광주 집에 모교 후배들을 데려다 숙식을 제공하며 훈련을 시킨 것이다. 그중 한 명이 채태인이었다.
“감독님 집에서 먹고 자며 해태 선수들과 함께 훈련했으니 그 시간들이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었겠나. TV로만 보던 이호준 선배님도 가까이 볼 수 있었고, 팀 전지훈련 때도 감독님이 데려가주셔서 재미있게 훈련했던 기억도 난다. 돈이 없을 때는 주저 없이 감독님한테 용돈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그럴 때마다 감독님은 항상 용돈을 쥐어주셨다. 한번은 감독님이 내게 이렇게 물어보시더라. ‘넌 내가 안 무섭니?’라고. ‘다른 애들은 내가 무서워서 말도 못 붙이는데 넌 내가 편하냐’라고 물어 보셔서 ‘네 저는 감독님이 할아버지처럼 편하고 좋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감독님은 ‘별 희한한 놈 다 본다’라며 껄껄 웃으셨다.”
채태인과 김 전 감독과의 인연은 채태인이 삼성 유니폼을 입게 되면서 구단 사장과 선수로 이어졌고, 채태인은 9년 동안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삼성맨’으로 희로애락을 반복했다.
#‘채럼버스’ ‘채단경로’ ‘채름길’
2011년 5월 3일 사직 삼성전은 채태인한테 다양한 별명을 선사한 경기였다. 2회 무사 1루에서 유격수 땅볼을 치고 선행 주자가 포스아웃된 상태에서 1루 주자로 나간 채태인은 신명철의 우중간 타구에 2루를 밟고 지나가다 뜬공 아웃되는 줄 알고 1루로 귀루하려 했다. 그러나 타구가 중견수와 우익수 사이에 떨어지자 채태인은 1루로 가던 길을 멈추고 2루 베이스를 밟지 않은 채 2루 베이스와 마운드 사이 잔디를 가로 질러 3루로 내달렸다가 아웃됐다. 이 일이 있은 후 채태인은 ‘채름길’(채태인+지름길) ‘채럼버스’(채태인+콜럼버스) ‘채단경로’(최단경로)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 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했다. 순간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이듬해 한화전에서 ‘산책 수비’로 또다시 비난을 한몸에 받았다. 김경언의 내야땅볼을 잡은 내가 1루 베이스로 천천히 가다가 온 힘을 다해 1루로 내달린 김경언을 살려준 일이다. 그때 진짜 욕 많이 먹었다.”
2012시즌 종료 후 채태인은 연봉 5000만 원까지 떨어졌다가 2013시즌 이후 연봉이 320% 인상된 2억 1000만 원을 받으면서 팀 내 최고 인상률을 기록하게 된다.
#등번호 17번과 추신수
채태인은 삼성 시절부터 줄곧 등번호 17번을 달고 뛰었다. 히어로즈로 트레이드 됐을 때는 서동욱이 17번을 달고 있었는데 서동욱이 KIA로 이적하자 채태인이 17번을 달 수 있었다. 롯데에서도 17번이었지만 SK 시절에는 노수광이 17번을 달고 있어 등번호를 ‘00번’으로 달고 나왔다. 채태인이 17번을 좋아한 이유는 추신수 때문이었다.
“(추)신수가 미국 가서 17번을 달고 뛰었고, 신수의 플레이를 좋아했고, 그를 닮고 싶은 마음에 17번을 고집하게 된 것이다. 단 한 번도 신수가 한국에서 뛰게 되리라곤 상상조차 못했는데 신수가 SSG로 왔고, 이태양의 양보로 지난 시즌까지 내가 달았던 17번을 신수가 다는 걸 보고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만약 내가 SK에 남아서 SSG 선수로 뛰었다면? 이후 추신수가 오게 돼 등번호 17번을 놓고 고민했다면? 난 양보했을 것 같다. 신수의 17번을 보고 나도 그 번호를 달게 됐기 때문에 추신수한테 17번을 건네줬을 것이다. 그래야 태양이처럼 시계를 받았을 것 아닌가(웃음).”
인터뷰 말미에 채태인은 지난 11월 초 제주도에서 지인들과 여행 중 SK 구단 관계자로부터 방출 통보를 받던 순간을 떠올렸다.
“전화로 방출 소식을 듣고 있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내렸다. 준비 없이 받은 이별 통보라 더 가슴이 아팠다. 돌이켜 보면 내 야구 인생은 모 아니면 도였던 것 같더라. 사건 사고도 많고, 야구 성적도 극과 극을 이뤘다. 그래도 자부하는 건 누가 뭐라고 해도 야구는 열심히 했다는 점이다. 그걸 위안 삼고 또 다른 형태로 야구와의 인연을 이어가고 싶다.”
채태인은 프로 통산 14시즌 동안 1240경기 타율 0.298 1162안타 127홈런 OPS 0.822를 기록했다.
이영미 스포츠전문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