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세 뱀파이어에서 점점 ‘사람냄새’ 나는 캐릭터로…“예능 욕심 여전, 풀어진 모습 보여줄 것”
‘확신의 CEO상’이란다. 여성 팬들 사이에서 오피스 로맨스 장르의 남자 주인공을 꼽으라면 늘 상위권에 오르는 배우 이수혁(33)의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다. 보고서의 자간 크기 하나라도 규칙에 어긋나면 눈앞에서 차갑게 면박을 줄 것 같은 이미지 덕일까. 현실과 동떨어진 캐릭터를 연기해도 “얼굴이 개연성”이라는 말로 다 포용이 되는 대중들의 너그러움에 이수혁은 웃음부터 터뜨렸다. 그나마 지금은 좀 더 인간적인 영역으로 내려와 대중들과 깊게 호흡할 수 있게 됐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인생 한 방을 노리는 도유꾼들의 막장 팀플레이를 그린 영화 ‘파이프라인’에서 이수혁이 맡은 캐릭터 황건우도 그랬다. 수천억 원 상당의 기름을 한 번에 빼내는, 사상 최대 최악의 도유 계획을 기획해 낸 정유기업 후계자라는 점에서 지위는 이전과 비슷하다. 다만 빌런(악당)의 입장에 있으면서도 왠지 허술하기도 하고 살짝 나사가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 유하 감독이 지향한 인간적인 빌런의 모습이 담긴 셈이다.
“이전까지 감독님이 하셨던 작품 속 빌런과는 다른 모습을 건우에게서 보고 싶어 하셨던 것 같아요. ‘비열한 거리’나 ‘말죽거리 잔혹사’ 등 누아르적인 작품에서는 완벽한 빌런의 모습을 추구하셨지만 이번 작품은 기존 영화와는 다른, 좀 더 쉽고 유쾌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기 때문에 건우를 단순히 완벽한 긴장감이나 악함만을 드러내는 캐릭터가 아니라 어느 정도 약한 지점이 드러나는 모습을 담은 캐릭터로 만드셨어요. 그래서 등장 신도 전동 휠을 타고 등장하는 모습이죠(웃음). 대사도 저희가 일부러 웃기게 찍은 건 없는데 뭔가 과장되게 웃기기보단 블랙 코미디적 요소를 조금 주려 하셨던 것 같아요.”
감독이 지향한 바와 마찬가지로 이수혁 역시 너무 완벽해 보이지 않기 위해 애쓴 흔적을 영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견고한 ‘외적 이미지’를 탈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쌍꺼풀이 없고 눈시울이 긴, 날카로운 눈매 탓인지 그렇지 않다면 동굴 속에서 울려 퍼지는 듯한 저음 탓인지 그에게는 다소 차갑거나 무거운 이미지의 캐릭터가 주어져 왔다. 원 패턴 연기와 캐릭터로 굳어진다는 것은 배우라면 반드시 피하고 싶은 일일 수밖에 없었다.
“제가 모델 일을 너무 오래했고, 또 모델로 더 많이 예쁨을 받고 일하다 보니 그런 이미지가 각인된 것 같아요. 이후에도 드라마 작품에서 제게 멋진 역을 많이 주시다 보니 계속 그런 이미지가 있었죠. 그래서 저 스스로도 연기와 캐릭터의 폭을 넓힐 수 있는 방법을 많이 고민했었어요. 예전엔 그런 부분에서 답답함도 있었어요. 그래서 체중을 늘린다거나 예능 촬영을 한다든지, 작품을 홍보하는 데 있어서 좀 더 풀어진 모습을 많이 보여드리려고 했었죠.”
그러면서 이수혁은 이제야 자신의 노력이 조금씩 빛을 보고 있다며 이전보다 한결 가벼워 보이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예전에 비하면 (배역이) 많이 인간다워지고 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예전보다 배역의 지위가 많이 떨어졌죠. 그전까진 완전 판타지 속에 있었거든요. 나이가 막 900살인 뱀파이어고 그랬는데 지금은 이사님, 실장님 하다가 팀장님까지 내려왔잖아요(웃음). 이전에 제가 연기한 작품 중에 ‘동네의 영웅’이란 작품이 있는데 제가 거기서 청년 백수로 나와요. 버스에서 졸기도 하고, 트레이닝복에 늘어난 티셔츠도 입고 좀 자연스럽고 저 나름대로 할 수 있는 풀어진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죠. 그걸 보시고 친한 작가님이나 감독님들이 좋은 피드백을 주시더라고요. 그런 모습이 대중들에겐 익숙한 모습이 아니라서 아직까진 이미지 변화에 한계가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더 잘해내고 싶고, 더 풀어진 모습을 빨리 보여드려서 저를 봐 주시는 모습을 다양화시키고 싶어요.”
대중들이 이수혁에게 가진 선입견을 풀어주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저는 무겁거나, 차갑고, 멋진 스타일이 아닙니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었다. 그보단 오히려 그 나이 또래보다 조금 더 소년 같은 모습이 오프(Off) 상태의 이수혁이라고.
“제가 모델 생활을 굉장히 오래 하다 보니 사진으로 저를 먼저 접한 분들은 제가 연기할 때 목소리를 듣고 어색해 하시기도 하더라고요(웃음). 주로 차가운 캐릭터와 실제와는 거리가 먼 캐릭터를 연기하다 보니 저를 그런 이미지로 생각을 많이 하시기도 해요. 그런데 실제 모습의 저는 무겁거나 차갑고, 멋진 스타일은 아니에요. 그냥 영화 좋아하고, 친구들하고 노는 거 좋아하는 남자아이… 아이라기엔 제가 좀 나이가 들었나요?(웃음) 개인적으론 제 지인들이 저를 생각했을 때 무겁고 재미없는 사람이 아닌 유쾌하고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요.”
이처럼 지인들만 알고 있는 이런 모습을 대중들에게 언제든지 보여드릴 만반의 준비도 돼 있었다. 2020년 MBC 예능 프로그램 ‘끼리끼리’에 출연한 것도 그런 마음가짐의 한 갈래였다. 아쉽게도 시청률 부진으로 단기간에 종영하긴 했지만, 앞으로 이수혁을 또 다른 예능에서도 볼 수 있다는 징검다리의 역할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저는 무거운 분위기보다 밝은 분위기가 좋아요. 옛날엔 배우로 좀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자리 잡기 전에 예능 출연을 하는 게 겁이 많이 났는데 나중엔 그런 부분에서 갈증이나 답답함을 느끼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지난해 버라이어티도 나름 시도해 보고, 지금처럼 작품 홍보를 위한 콘텐츠 촬영도 도전해 봤는데 제가 생각을 많이 안 하고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줘도 대중들이 좋게 봐 주시더라고요. 또 팬들은 특히 좋아해주시고. 그래서 앞으로 그런 콘텐츠 촬영으로 드라마 속 모습과는 또 다른 제 모습을 많이 보여드리고 싶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