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쏘는 여전사’ 매력이 우두두두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이라는 장르가 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말까지, 약 10년 동안 쏟아졌던 이 장르의 영화들은 주로 마약, 범죄, 섹스 등 도시 뒷골목의 어두운 세계가 배경이며 흑인 배우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말 그대로 ‘흑인’(black)을 ‘착취’(exploitation)했던 이 장르가 등장한 것은 할리우드의 불황이 그 배경이었다. 적은 예산으로 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 스튜디오는 개런티가 적은 흑인 배우에게 눈을 돌렸다. 게다가 이 영화들은 흑인 관객들도 대거 끌어들일 수 있었다.
블랙스플로이션의 주인공은 남성에서 여성으로 이동한다. 여배우의 개런티가 더욱 쌌고 볼거리(?)도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 틈새에서 등장한 팸 그리어는, 하지만 결코 강간의 희생자가 되는 나약한 여성이 아니었다. 그녀에겐 웬만한 남성은 대적하지 못할 완력이 있었고 그녀를 통해 할리우드 액션 헤로인의 역사는 비로소 시작된다.
1949년 5월 26일 노스캐롤라이나에서 태어난 팸 그리어의 아버지는 흑인이었고 어머니는 인디언이었다. 공군 정비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영국과 독일 등을 떠돌며 성장했던 팸 그리어는 열 살도 되기 전에 아동 성추행을 당하는 끔찍한 경험을 한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내성적이고 말 없는 아이로 성장했는데, 간호사였던 어머니는 딸의 성격을 고치기 위해 연극을 시키고 틴에이저 때는 미인 대회에 내보냈다.
1년의 회복기를 거쳐 돌아왔을 때 그녀를 반기는 건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들이었다. <카피 Coffy>(1973)에서 마약 딜러에게 여동생의 복수를 안기는 간호사로 등장하며 스타덤에 오른 그녀는 곧 이 장르의 여왕이 되었고 <폭시 브라운>(1974)으로 숭배의 대상이 된다. 팸 그리어의 캐릭터는 달랐다. 173센티미터의 키에 38-22-36의 압도적인 육체로 남성들을 향해 거침없이 총을 쏘는 그녀의 모습엔 털끝만큼도 모호한 구석은 없었고 매사에 독립적이었다. 당시 거센 바람이 불던 페미니즘 진영으로부터 그녀는 롤 모델로 추앙 받았고 흑인 여성들에겐 워너비가 되었다.
팸 그리어의 육체적 매력은 여배우의 전형적인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대담하고 공격적이었던 그녀의 캐릭터는 폭력적이면서도 섹스어필했다. 그녀가 지닌 강한 ‘육체성’의 뉘앙스는 당대 그 어떤 여배우도 지니지 못한 것이었으며 군살 없는 근육질은 출산이나 육아 같은 여성적 영역과는 거리가 멀었다. 실제로 그녀는 결혼한 적이 없으며 자녀도 없다.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장르가 급격한 하락세를 겪은 1980년대에 그녀의 경력도 함께 추락했고, 그녀는 케이블 TV용 영화를 전전한다. 1988년엔 암에 걸려 18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이겨냈고 스티븐 시걸 주연의 <형사 니코>(1988)로 서서히 시동을 건 후 흑인 액션 영화인 <파시>(1993)를 거쳐 <재키 브라운>(1997)으로 완벽히 컴백한다.
‘벌거벗은 액션 여전사’였던 팸 그리어는 섹스와 폭력을 양 손에 쥐고 능수능란하게 휘둘렀던 1970년대에 가장 뜨거운 육체였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영화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고 팸 그리어는 수많은 역경을 극복하면서 점점 강인한 육체가 되었다. 아직도 활발한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팸 그리어. 한때 NBA의 빅 스타였던 카림 압둘 자바의 연인이기도 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