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벌이에 집중하면 ‘독이 든 성배’
대기업의 연예계 진출 신호탄은 1995년 7월부터 활동을 시작한 삼성영상사업단이었다. 1999년 1월 삼성영상사업단은 결국 영화계를 떠났지만 그들의 마지막 작품 <쉬리>는 2000년대 한국 영화 전성기의 문을 찬란하게 연 작품이었다.
4년가량 활동한 삼성영상사업단이 영화계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전근대적인 형태의 영화 사업에 대기업의 경영 방식이 도입된 것. 기획, 투자, 제작, 배급 등의 영화산업 시스템이 마련된 것은 물론이고 ‘투명 경영’과 ‘긴 안목을 바탕으로 한 기획’의 틀을 닦아 놓기도 했다. 또한 삼성영상사업단 출신 영화인들이 2000년대 영화계를 주도했는데 최완 아이엠픽쳐스 대표, 최진화 전 엠케이픽쳐스 이사, 노종윤 노비스엔터테인먼트 대표, 최건용 롯데엔터테인먼트 상무이사 등이 대표적이다. 또한 서울단편영화제를 통해 곽경택 임순례 정지우 송일곤 박기형 김지훈 등 실력파 영화감독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충무로에선 삼성영상사업단으로 인해 감독이 되려면 유명 감독의 조감독을 거쳐야 하는 충무로 도제 시스템이 붕괴됐다고 평가하고 있다.
대기업의 첫 연예계 진출은 나름 성공적이었다. 이에 CJ, 오리온, 롯데 등의 대기업이 연이어 영화계에 진입했다.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 극장 체인을 운영하는 이들 대기업은 투자와 배급까지 진출해 투자, 배급, 극장을 독점했다. 여기에 KT까지 자회사 싸이더스FNH를 통해 투자, 배급 시장에 뛰어들었다.
2000년대 중반부터 이동통신사들이 콘텐츠 확보를 위해 경쟁적으로 연예계로 뛰어들었다. 2005년 SK텔레콤이 종합엔터테인먼트 그룹 IHQ를 인수하자 KT 역시 2005년 영화제작사 싸이더스FNH를 인수하고 2006년에는 드라마 외주제작업체 올리브나인까지 인수한 것.
싸이더스FNH와 IHQ는 당시 연예계를 대표하는 업체들이었다. 한때 싸이더스라는 하나의 회사이기도 했던 이 두 회사의 뿌리는 차승재 전 대표의 우노필름과 정훈탁 대표의 EBM 프로덕션이다. 차 전 대표는 <무사> <살인의 추억> <범죄의 재구성> 등의 영화를 제작하며 싸이더스FNH를 웰메이드 상업영화를 제작하는 국내 최고의 영화제작사로 성장시켰다. 정 대표가 이끈 IHQ는 톱스타만 50여 명 이상 소속된 국내 최대의 매니지머트사인 싸이더스HQ와 영화제작사 아이필름 등을 거느린 종합엔터테인먼트 그룹이었다. 이 두 거대 회사가 양대 이동통신사인 KT와 SK텔레콤에 인수합병된 것.
그렇지만 두 회사 모두 2000년대 후반 들어 쇠퇴했다. 싸이더스FNH의 경우 <용의주도 미스신> <라듸오 데이즈> <트럭> <1724 기방난동사건> 등 제작하는 영화들이 연이어 흥행에 실패했다. 이로 인해 싸이더스FNH를 이끌어온 차 대표가 회사를 떠나야 했다. 이후 싸이더스FNH는 투자와 배급에 중점을 두는 회사로 변화했다.
SK텔레콤이 최대주주가 돼 경영권을 확보하면서 정훈탁 대표 역시 IHQ를 떠났다. 이처럼 2000년대 초중반 연예계를 대표하는 인물이던 차승재 전 대표와 정훈탁 대표가 각자의 회사가 대기업의 투자를 받았지만 결국 회사를 떠나면서 연예계에선 대기업 투자가 독이 든 성배라는 말까지 나돌았다.
SK텔레콤이 최대 주주가 된 뒤 IHQ는 과거의 명성을 잃기 시작했고 소속 톱스타도 상당수 IHQ를 떠났다. 결국 SK텔레콤은 2010년 4월 IHQ의 지분 27.09%를 2대 주주인 정 대표에게 매도하면서 정 대표가 다시 최대주주 겸 대표이사로 일선에 돌아왔다. 2006년 인수 당시 주가가 8000원가량이라 400억 원 이상 투자했던 SK텔레콤이 주가를 매도한 2010년엔 주가가 1030원까지 폭락해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했다.
KT의 경우 싸이더스FNH는 유지하고 있지만 2009년 올리브나인에서 손을 뗐다. 거듭되는 영업적자로 인해 결국 올리브나인을 떠난 것. 드라마 <주몽> 등을 제작하며 대표적인 외주제작사로 손꼽히던 올리브나인은 결국 2010년 상장 폐지됐다.
거듭된 대기업의 연예계 진출 실패에는 다양한 원인이 거론되고 있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단연 대기업과 연예계의 구조적인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다. 경영 관련 부분에선 대기업이 뛰어나지만 연예 산업의 핵심인 콘텐츠 생산에선 대기업의 기업 논리가 통하지 않았다.
영화 산업의 경우 투자 배급 극장 등 산업적인 부분에는 대기업이 안착했지만 콘텐츠를 만드는 제작 부분에선 아직 큰 재미를 보지 못하고 있다. 국내 최대 제작사이던 싸이더스FNH 역시 KT 계열사가 된 뒤 제작보다 투자 배급에 중점을 둔 회사로 변신했다.
KT의 드라마 외주제작업체 올리브나인 인수도 실패로 마무리됐다. 이는 드라마 외주 제작 시스템 전반에 문제가 많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한 외주제작업체 관계자는 “방송국이 패권을 쥐고 있는 상황에서 비현실적인 제작비로 드라마를 제작하는 적자 현실은 대기업도 어찌하지 못할 것”이라 말한다. 실제 대박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외주제작사 역시 큰돈을 벌진 못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매니지먼트 업계 역시 대기업의 기업 논리가 통하지 않았다. 압도적인 1위 자리를 지키던 연예기획사인 싸이더스HQ를 계열사로 둔 IHQ를 인수한 SK텔레콤이 결국 경영을 포기한 것.
연예관계자들은 대기업의 연예계 진출에 경계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돈이 되는 부분에 집중하고 돈이 안 되는 부분은 쉽게 사업을 접어버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화계의 경우 대기업이 투자 배급 극장을 독점하면서 여러 가지 부작용이 제기되고 있다. 돈이 될 영화 위주로 투자와 배급이 이뤄져 작품성을 앞세운 영화는 개봉관을 잡기조차 힘들고 개봉해도 교차 상영되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