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팽팽한 국면서 자꾸 돌 던지나
▲ 이창호 9단 |
‘국수’는 한국 최고(最古) 전통의 바둑 타이틀로 역대 타이틀 홀더의 면면은 그대로 한국 현대바둑 대표기사의 계보, 타이틀 대통의 계승자여서 흔히 ‘국수산맥’으로 불리는데, 최 9단은 국수 계보로 조남철-김인-윤기현-하찬석-조훈현-서봉수-이창호-루이나이웨이에 이어 아홉 번째 인물. 열 번째가 윤준상 8단이며, 이세돌 9단이 뜻밖에도 열한 번째. 세계 제일인자지만 대통의 서열에서는 후배 최철한에게 두 걸음 뒤진 것. 그런가 하면 서봉수와 이창호 사이에, 이창호보다 먼저 두각을 나타냈던 유창혁 9단이 ‘국수 산맥’에서 빠져 있는 것이 아쉽다.
이창호 9단이 아직은 무관으로 전락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도 있다. KBS바둑왕전 때문이다. 현재 29기가 진행 중인데, 28기의 우승자가 이창호 9단이니 29기의 임자가 정해질 때까지는 이창호 9단을 타이틀 홀더로 보아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바둑왕전은 도전제 기전처럼 올해 우승하면 내년에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다가 도전자가 정해져 올라오면 도전자와 타이틀 매치를 벌이는 방식이 아니라 올해 우승자라 해도 내년에는 다시 본선부터 뛰어야 하는 선수권제이고, 29기는 현재 결승을 앞두고 있는데, 백홍석 7단과 박정환 9단이 결승에 올라가 있으니 이창호 9단을 타이틀 보유자라고 하기도 좀 그렇다. 그리고 요즘은 도전제가 아니라 선수권제가 대세다. KBS바둑왕은 23년 전 이 9단의 첫 타이틀, 그리고 지금은 마지막 타이틀, 인연이 묘하다.
이 9단의 무관은 스승 조훈현 9단의 무관과도 비교가 되고 있다. 조훈현 9단의 첫 타이틀은 1974년 제14기 최고위. 부산일보가 주최하던 기전으로, 국수전 다음의 전통을 자랑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창호 9단의 본격 첫 타이틀도 1990년 2월 2일, 제28기 최고위. 이 9단은 1989년에도 조 9단의 최고위에 도전했는데, 첫 도전5번기에서는 1승 3패로 물러났다.
조 9단이 무관이 된 것은 1995년 2월 대구의 매일신문이 주최하다가 지금은 역시 없어진 제12기 대왕전 도전5번기 제4국에서였다. 도전자는 이창호. 결과는 이창호의 반집승. 21년 동안 조 9단의 머리에는 항상 복수의 왕관이 빛나고 있었는데, 그 빛의 영광을 지운 사람이 제자였던 것. 그러나 조 9단은 이후 즉시 기력을 회복해 2002년 시즌까지 국내-세계기전에서 20여 개의 타이틀을 추가했고, 지금도 승부 일선에서 분투하고 있다.
이창호의 머리 위에서도 스승과 비슷하게 22년 동안이나 복수의 왕관이 빛나고 있다가 이제 홀가분한 몸이 되었는데, 과연 앞으로도 스승과 비슷한 모습을 보일지 궁금하다. 다만 “최근 이창호의 패배와 무관 전락은 불가사의하다”고 지적하는 소리도 있다. 중요한 대국 결정적인 대목에서, 불리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거나 오히려 유리해 보이는 장면에서 느닷없이 돌을 거두었다는 것.
<장면 1>은 국수전 도전4국. 이 9단이 흑이다. 이 9단은 평소와는 다르게 초반부터 강수를 연발했고, 우하변에서 흘러나온 백들의 대마를 일직선으로 쫓아가며 맹공을 퍼붓다가, 백1로 끊는 것을 보고는 돌을 거두었다. 백1이 실전 백98이다. 공격 실패, 백 대마를 잡을 수 없고, 그러면 집부족을 만회하기 어렵다고 본 것이라는데, 글쎄, 이 9단의 판단이니 틀릴 리는 없다고 하면서도 전적으로 승복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장면 2>는 2월 9일 후지쓰배 대표선발전, 원성진 9단과의 대국. 이 판도 이 9단이 흑이다. 바둑판 전반에 걸쳐 흑들과 백들, 무지막지한 대마들이 얽혀 있다. 초대형 수상전인데, 상변 흑1로 붙이고 백2로 젖히자 이 9단이 돌을 거두었다.
계속 두어봤자 <참고도>처럼 상변 백2와 12로 젖혀 놓고, 그보다는 중앙 백14가 묘수여서 다음 흑15~백18이면 흑은 A의 곳도 잇고 들어와야 하니 흑이 수부족이라고 본 것이라는데, 그래서 다들 그렇게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것.
국후 신예·중견·노장들의 합동 연구에 의해 <참고도> 백14가 묘수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실제는 이후 어떻게 변화해도 유가무가로 흑이 이긴다는 것. 이창호가 착각한 것일까. 워낙 대형 수상전이니 천하의 이창호도 그럴 수가 있겠지만, 사이버오로의 기자는 검토 자리에 있던 노장 기사가 “우리 같은 늙은이도 보는 수를 이창호가 못 보았다는 건 정말 이상하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고 전한다.
<장면 3>은 근래 바둑은 아니다. 지난해 화제가 되었던 이창호의 단명국. 2010년 1월 16일, 제2기 BC카드배 본선 64강전. 이 바둑도 이 9단이 흑이다. 상대는 당시 연구생으로 통합예선을 통과한 17세 연구생 한태희 소년. 작년 10월에 연구생 내신 1위로 입단해 지금은 초단이다.
좌상귀 쪽 흑1로 붙이고 백2로 젖히자 이 9단은 돌을 거둔 것. 백2가 실전 백96이다. 당시도 말이 많았다. 이 9단이 유리하다고 주장하기는 그렇지만 그렇다고 불리한 상황은 결코 아닌 것 같다는 것이었다.
최근만 그런 게 아니다. 앞서 말한 스승 조훈현 9단과의 첫 타이틀 매치, 최고위전 도전기 때도 이 비슷한 상황이 있었고, 그 후에도 이런 경우는 두어 차례 또 있었다. 이창호는 왜 느닷없이, 100수도 안 둔 상태에서 돌을 거두곤 하는 것일까. 어느 순간, 모든 게 귀찮아지고, 부질없이 여겨지는 그런 순간이 있는 것일까. 누가 알 수 있으랴. 돌부처의 깊고 깊은 뜻을.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