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 끄기 급급…의혹 더 불 지폈다
▲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해 5월 상하이 엑스포에 방문해 한국관을 시찰하는 모습. 당시 방문 일정과 구체적인 동선 기밀까지 덩신밍 씨를 통해 유출됐다. 연합뉴스 |
“지금까지 공개된 기밀은 조족지혈에 불과할 것이다.” 최근 기자와 만난 정보당국의 한 고위관계자가 던진 일성이다. 이 관계자는 “덩 씨의 역할과 비중, 외교가에서의 막강 영향력 등을 감안하면 이미 공개된 기밀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고 보다 파괴력 있는 국가기밀이 유출됐을 개연성이 높다”며 “총리실과 법무부 등 정부당국이 사건을 사전에 인지하고도 축소·은폐를 시도하려 한 배경에는 공개할 수 없는 메가톤급 국가기밀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고 전했다.
‘공개할 수 없는 국가기밀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 관계자는 “범정부 차원에서 조사에 착수한 만큼 결과를 지켜봐야 구체적인 진상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제한 뒤 “대북 관련 기밀이나 대중국 외교와 관련된 민감한 문건, 현 정부가 은밀히 추진하고 있는 동북아 정책 등 국가 1급 기밀사항이 유출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귀띔했다.
정치권과 외교·정보당국 주변에서도 공개된 것 외에 중요한 국가기밀이 유출됐을 것이란 조심스런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현재까지 덩 씨를 통해 유출된 것으로 확인된 정보는 현 정권 실세를 비롯한 정치인 200여 명의 휴대전화번호와 영사관 내부 자료, 이 대통령을 비롯한 국내 주요 인사들의 상하이 방문 일정과 동선 등이다.
‘MB 선대위 비상연락망’이라는 제목이 붙은 문건에는 이 대통령을 포함해 현 정권 실세와 여당 의원들의 휴대전화번호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이 문건은 덩 씨의 부적절한 행실을 의심한 남편(진 아무개 씨)이 덩 씨가 사용하던 개인 금고와 휴대전화 컴퓨터 디지털카메라 등에서 확보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국내 유력 정치인들의 휴대폰번호 유출은 도청에 노출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주고 있다. 실제로 중국을 비롯한 주요 국가 정보기관들의 도청 수준은 전화번호만 알아도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중국 정보기관에 이 대통령을 비롯한 정권 실세들과 유력 정치인들의 휴대전화번호와 총영사관 내부 연락망 등이 넘어갔다면 이들의 통화 내용 역시 고스란히 노출됐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덩 씨는 상하이 총영사관 내부 자료도 전 방위적으로 수집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덩 씨는 상하이 총영사관 월별 비자 발급 현황 및 비자 심사 대리 기관, 비자 대행신청 여행사 현황 등이 상세히 적힌 대사관 내부 문건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로 덩 씨가 확보한 ‘특채파동과 연평도 혼란에 묻힌 외교부 인사’라는 문건에는 유명환 전 외교부 장관의 딸 특채 파동 이후 외교부 인사동향 및 내부 분위기가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덩 씨는 이 대통령의 상하이 방문 일정 및 구체적인 동선을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나 충격을 더해주고 있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상하이 엑스포 개막에 참석한 바 있다. 대통령의 일정과 동선은 테러 등의 위험 때문에 국내에서도 철저히 보안에 부치는 1급 비밀로 분류되고 있다. 당시 상하이 총영사관 상무관으로 재직 중이던 K 전 영사는 별도의 검문·검색 절차 없이 이 대통령을 행사장에 출입시키는 문제와 행사장 내부에서 전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부분이 중국 측과 협의되지 않자 덩 씨에게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덩 씨는 이 과정에서 이 대통령의 일정 및 의전과 관련된 공문을 요구했고, K 전 영사는 1급 비밀을 덩 씨에게 전달한 것으로 드러났다. 덩 씨는 비슷한 시기에 상하이를 방문했던 신정승 전 주중대사 등 국내 주요 인사들의 일정과 동선 관련 정보도 사전에 입수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처럼 덩 씨의 역할과 비중, 막강 영향력에 미뤄 그에게 유출된 정보나 국가기밀은 공개된 것보다 훨씬 많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실제로 덩 씨는 화려한 중국 인맥을 바탕으로 상하이 총영사관이 난제에 봉착했을 때마다 해결사로 나서 큰 도움을 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2008년 국군포로 및 탈북자 11명의 동시송환, 신정승 당시 주중대사와 위정성 당서기 및 한정 상하이 시장의 동시면담 주선, 우리 공무원이 중국해관(세관)에 적발된 밀수사건 무마, 2009년 제주도와 상하이시 간의 우호도시 협정 체결 등은 덩 씨가 해결사로 나선 대표적인 사례들로 꼽히고 있다.
덩 씨는 또 2008년 11월과 2009년 4월에 각각 상하이를 방문한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과 오세훈 서울시장이 당서기와 상하이 시장을 면담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덩 씨는 한국 화장품회사 중국 현지법인의 총경리(고문)로 위촉돼 거액의 돈을 챙기는 등 중국에 진출한 국내 기업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처럼 덩 씨는 총영사관 관계자뿐 아니라 상하이를 방문한 정권 실세들과 중국 진출 기업인 등 정·관계 인사는 물론 민간인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과 광범위한 교류를 맺어온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총영사관 관계자들을 비롯한 정부 차원의 전 방위적인 조사가 이뤄질 경우 덩 씨에게 건네진 정보 및 국가기밀도 속속 드러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덩 씨가 사용하고 있는 대형 개인금고 두 개 중 한 개의 내용물은 아직까지 공개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추가 기밀 유출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덩 씨의 남편 진 씨는 일부 자료를 국무총리실 등에 제공한 직후 주변 지인들에게 “아내는 평소 대형 개인금고 두 개에 주요 문건 및 귀금속 등을 보관해왔다”며 “금고 한 개는 수십 번 시도한 끝에 우연히 비밀번호를 맞춰 열 수 있었지만 나머지 한 개는 비밀번호를 끝내 맞추지 못해 열어보지 못했으며 이 금고에 어떤 내용이 있을지 상상도 못할 정도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미 공개된 정보 외에 덩 씨에게 유출된 중요 정보 및 국가기밀이 더 있을 것이란 관측에 한껏 무게를 실을 수 있는 정황이다.
정부당국 일각에서는 덩 씨와 부적절한 관계였음을 시인한 H 전 영사가 참여정부 시절 청와대에 파견된 적이 있다는 사실에 미뤄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공개 발언록 등 ‘참여정부 X파일’이 덩 씨에게 건네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관측이 제기되고 있다.
정부당국의 소극적인 초기 대응 및 안이한 조사 방식도 추가 국가기밀 유출 의혹을 부추기고 있다. 총리실과 법무부 등 당국은 이미 한 달 전에 이번 사건에 대한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하지만 정부는 단순한 치정사건으로 축소·은폐하려 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여기에 사건을 둘러싼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는데도 제보와 진술에만 의존하고 있는 총리실과 관련 부처의 안이한 조사 방식은 또 다른 의혹을 낳고 있다. 특히 사건의 열쇠를 쥐고 있는 총리실은 3월 13일 합동조사단이 상하이 현지 조사를 통해 사실 관계를 확인한 뒤 검찰 수사 의뢰 등을 검토하겠다는 답답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IP 추적 등 사법적 권한이 없는 총리실이 소극적인 조사로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 사건에 연루된 핵심 당사자들에게 증거를 은폐하거나 인멸할 기회를 제공하는 게 아니냐는 의혹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정치권 일각에서 공개할 수 없는 국가기밀이 유출된 것을 인지한 정부당국이 사건을 축소·은폐하려는 의도를 갖고 소극적이고 안이한 대처로 시간끌기 내지는 물타기를 시도하고 있다는 비판이 일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된다.
과연 한국 외교가를 뒤흔들며 한국판 마타하리 사건으로 확전되고 있는 ‘상하이 스캔들’ 사건의 실체적 진실은 밝혀질 수 있을까. 또 공개된 기밀 외에 덩 씨나 중국정부로 유출된 또 다른 국가기밀은 정말 없는 걸까. 치열한 진실게임 양상으로 치달으면서 한·중 외교갈등 문제로 확전될 조짐이 일고 있는 이번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국민적 이목이 집중 되고 있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