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 성향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사회적 약자·소수자·노동자 권익보호 신념 확고
김명수 대법원장은 8월 11일 문재인 대통령에게 오경미 고법판사를 대법관 후보자로 임명제청했다고 밝혔다. 이제 국회 인사청문회를 거쳐 대통령이 임명하는 절차만 남겨두고 있다. 오 고법판사를 임명제청한 데 대해 대법원은 “오경미 고법판사는 사법부 독립과 국민의 기본권 보장에 대한 의지, 사회적 약자·소수자 보호에 대한 신념 등 대법관으로서 자질을 갖췄고 합리적이고 공정한 판단 능력과 폭넓은 법률 지식 등을 겸비했다”고 밝혔다.
이기택 대법관 후임 선정을 위해 대법원은 법원 내·외부로부터 대법관 대상자 43명을 추천 받았는데 이 가운데 17명이 심사에 동의했다. 17명 후보자는 현직 법관이 14명, 변호사 2명, 교수 1명 등이었다. 후보 17명 가운데 15명이 남성이고, 13명이 서울대 법대 출신이었으며, 평균 나이는 55세였다. 당시만 해도 이번에도 ‘대법관은 서오남(서울대·50대·남성)’이라는 공식이 이어지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이후 대법원은 후보들의 학력과 주요 경력, 재산, 병역, 형사처벌 전력 등을 홈페이지 등에 공개한 뒤 시민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을 거쳤고,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3명의 대법관 제청 대상 후보자를 선정했다.
3명의 후보자는 손봉기 대구지법 부장판사(55·22기), 하명호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52·22기), 오경미 광주고법 전주재판부 고법판사(52·25기)였다. 법원 안팎에선 현직 법관인 손 부장판사와 오 고법판사의 2파전이라고 보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사실 법원 내부에서는 손 부장판사가 더 유력하다는 얘기가 많았다. 익명을 요구한 법원 관계자는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비서울대’에 ‘지역 법관 출신’이라는 상징성이 있는 데다 손 부장판사에 대한 김명수 대법원장이 신임이 두텁다고 알려져 있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설명했다. 손 부장판사는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실시된 법원장 추천제에 의해 처음으로 법원장을 맡은 인사이기도 하다. 게다가 김명수 대법관이 임명제청했던 대법관들이 대부분 고등법원 부장판사인 현직 남성 고위 법관이었다는 점도 손 부장판사가 앞서 있다고 보는 근거가 됐다. 또한 손 부장판사는 5월 8일 퇴임한 박상옥 대법관의 후임 최종 후보 3명에 이름을 올린 데 이어 두 번째로 대법관 최종 후보가 된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김 대법원장이 임명제청한 인사는 오경미 고법판사다. 우선 17명 후보자 가운데 단 2명뿐인 여성 후보였다. 오 고법판사가 대법관으로 임명되면 박정화, 민유숙, 노정희 대법관과 함께 13명의 대법관 가운데 4명이 여성 대법관으로 구성된다. 또한 오경미 대법관 후보자는 사법연수원 25기로 현직 대법관 가운데 가장 낮은 기수인 22기 이흥구 대법관에서 3개 기수를 건너뛴 파격 인선이다. 고법 부장판사를 거치지 않은 최초의 대법관이라는 부분도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가 폐지된 법원의 현실이 반영된 임명제청이기 때문이다. ‘고법 부장판사 출신의 서오남(서울대·50대·남성)’이라는 기존 대법관 임명 공식에서 ‘서오’(서울대 출신의 50대)는 유지됐지만 ‘여성’이자 ‘고법 부장판사 출신이 아닌’ 대법관이 탄생하게 됐다.
전북 익산 출신으로 이리여고와 서울대 사법학과를 졸업한 오 후보자는 1996년 서울지법 판사로 임관해 법원도서관 조사심의관, 사법연수원 교수, 부산지법 부장판사, 서울고법 판사 등을 거쳤다. 2016년 이인복 대법관의 후임을 뽑는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에 참여했으며 2021년 2월에는 박상옥 대법관 후임 후보 15명에 들기도 했다.
법원 젠더법연구회 내 소모임인 ‘인터뷰단’과 ‘재판다시돌아보기팀’에서 활동했으며 n번방 사건 등 디지털 성범죄 연구를 위해 대법원 산하 커뮤니티 ‘현대사회와 성범죄 연구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다. 또한 법원 내에서는 김명수 대법원장이 추진한 ‘대등재판부제도’ 정착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인 ‘국제인권법연구회’ 출신이기도 하다.
주요 판결로는 양성애자라는 이유로 체포 등의 위협을 받아 한국에 입국한 우간다 여성의 난민 지위 소송에서 난민 지위 인정 판결을 내렸으며, 화학약품 운반선에서 근무한 항해사의 두드러기 증상을 직무상 질병으로 인정한 판결을 내렸다. 또한 학내 집단 따돌림에 시달리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여중생 사건에서 1심 판결을 뒤집고 가해자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이런 판결들을 통해 오 후보자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보호, 노동자의 권익 보호에 신념이 확고하다는 평을 받아왔다. 2020년에는 전북지방변호사회의 법관평가에서 5명의 우수 법관 가운데 한 명으로 뽑히기도 했다.
법원 내부에서는 적극적인 연구 활동만큼이나 적극적인 참여 의식도 돋보이는 판사라고 평하고 있다. 눈길을 끄는 이력이 몇 가지 있는데 우선 2012년 12월 민원인과 직원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나누는 취지에서 서울고등법원과 서울중앙지방법원 판사 27명이 마련한 ‘작은 음악회’다. 당시 서울고등법원 판사이던 오경미 판사는 이동원 부장판사와 함께 듀엣곡 두 곡을 불렀다. 2018년 먼저 대법관이 된 이동원 대법관에 이어 오경미 고법판사도 대법관 임명을 앞두고 있으니 지금 기준으로 보면 예비 대법관들의 듀엣이었다.
이날 공연에서 피아노 독주를 들려준 하상익 판사(사법연수원 34기)는 2016년 9월 서울고법이 서울대 로스쿨생을 대상으로 개최한 ‘2016 코트(Court) 콘서트’의 강연자로 나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32번 2악장을 직접 연주하며 악보에 적힌 ‘셈플리체(semplice, 단순하게 연주하라는 악보 용어)’의 의미를 대법원 판결을 설명하는 데 활용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2016 코트(Court) 콘서트’에는 판사 5명이 강사로 나섰는데 이 가운데 한 명이 오경미 고법판사였다. 오 고법판사는 하루 종일 여러 일에 시달린 엄마에게 알아듣지도 못할 법률언어로 조언을 하는 법률가 자녀들의 답답한 모습을 예로 들며 일상용어를 사용하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재판의 중요성을 강의했다.
전동선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