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중순 삼성자동차 채권단은 삼성그룹 이건희 회장으로부터 위임받은 삼성생명 주식 3백50만 주(17.65%)의 매각작업을 위해 우선협상대상자로 뉴브리지캐피탈을 선정했지만, 1월 중순이 지난 현재까지 실사 일정도 못잡고 있다.
때문에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된 뉴브리지와의 협상이 결렬되고 예비협상자로 선정된 워버그핀커스와의 협상도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는 섣부른 예측마저 나오고 있다. 해외매각이 무산되고 국내매각으로 방향을 틀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지난 1월11일 삼성자동차 주채권금융기관인 서울보증보험 정기홍 사장은 “뉴브리지가 삼성생명에 실사를 요청하면서 많은 요구조건을 내걸고 있으며 삼성생명이 이를 거부하면서 실사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며 우선협상대상자 선정 이후의 협상과정을 공개했다.
정 사장은 “2월 초까지 실사 일정 등을 잡지 못하면 뉴브리지와의 우선협상대상자 지위를 박탈하겠다”는 경고서한을 삼성생명과 뉴브리지 양쪽에 모두 보낼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제가 되고 있는 뉴브리지의 요구사항은 삼성생명의 기업공개, 정밀실사, 이사선임권 보장, 정보 열람권 등 크게 네 가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뉴브리지가 삼성생명 주식 매각 주간사인 메릴린치를 통해 요구한 것으로 알려진 이 네 가지 안건은 기업공개 뒤 주식매각 때 우선권 부여를 요구하고 있고, 이사진 선임도 단순히 사외이사가 아닌 재무담당 총괄이나 영업담당 총괄 등 실질적으로 기업내부 정보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는 자리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이런 뉴브리지의 요구조건에 대항하기 위해 삼성생명도 외국계 증권사를 자문사로 선정해 실사 자문을 맡기는 등 협상과정에서 기업비밀이 공개되지 않도록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진로의 전 오너인 장진호 전 회장측에선 해외자본을 유치하기 위해 골드만삭스와 계약을 맺었다가 골드만삭스가 진로의 내부정보를 이용, 계열사를 동원해 진로 채권을 대거 매입해 최대 채권자로 떠오르며 진로 매각과정에 ‘간여’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연찮게도 삼성생명에서 매각자문을 맡길 것으로 알려진 회사는 바로 그 골드만삭스다. 하지만 정 사장의 발언이 있은 뒤 삼성쪽에선 공식적으로는 “어떤 회사를 자문사로 선정할지 구체적으로 결정된 게 없다”고 밝히고 있다.
▲ 이건희 삼성 회장 | ||
표면적인 것만 놓고 보면 협상 과정이 지지부진한 이유가 매각 당사자인 채권단이나 삼성생명에 있는 것인지, 우선협상대상자인 뉴브리지캐피탈에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비공개 기업의 주식 지분을 대단위로 팔 때 뉴브리지의 요구 사항 정도는 통상적인 수준이라는 게 증권가의 지적이다. 문제는 이를 삼성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여부다.
만약 뉴브리지가 삼성생명이 갖고 있는 계열사 지분 관계나 삼성생명 자산 평가 등에 실사를 벌일 경우 기업비밀이 노출되기 때문에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지적이 일각에서 대두되고 있는 것. 게다가 뉴브리지가 이사 선임권을 행사해 경영에 참여하게 될 경우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와 연관된 투자유가증권의 처분 등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어 삼성으로선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문제가 커지게 될 공산이 크다.
때문에 뉴브리지에 이어 예비협상자로 선정된 워버그핀커스와의 협상도 이런저런 이유로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외국계 자본이 삼성생명 지분을 사들일 경우 매각 차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움직일 것이고 그럴 경우 기업공개와 재무구조개선을 통해 투자수익 극대화를 요구할 것이고 이는 그룹 전체의 지배구조까지 고려해야 하는 삼성그룹의 요구와는 어긋나기 때문이다.
주목할 만한 것은 채권단의 입장. 채권단은 워버그핀커스와도 비슷한 이유로 협상이 결렬될 경우 삼성생명 주식 해외매각 작업을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라는 의중을 비치고 있다. 서울보증보험의 정기홍 사장은 지난 11일 기자간담회에서 “인수후보자를 다시 찾는 방법과 삼성그룹에 바로 소송을 제기하는 방법 등 몇 가지 대안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우선 대상을 국내로 넓혀 새로운 원매자를 물색하게 될 것”이라고 밝힌 것.
삼성에 희망적인 점은 외국계 사모펀드가 은행이나 부동산 등 국내 투자 자산을 되팔면서 막대한 이익만 챙긴 것으로 알려지면서 최근 국내 여론이 ‘외국계 큰손’에 대해 비판적으로 돌아서고 있다는 점이다. 정 사장도 “삼성생명 지분매각은 단순히 사고 파는 문제가 아니라 보험산업 발전 등 국익을 우선해 처리해야 한다”고 국익론을 들고 나왔다.
이럴 경우 국내 사모투자펀드나 연기금 등이 인수협상자로 나설 가능성이 커진다.
실제로 군인공제회가 금호아시아나그룹으로부터 금호의 타이어사업 부문을 인수해 경영권을 건드리지 않고 배당만 챙겨 성공한 사례도 있다. 삼성으로서도 까다로운 조건을 내세운 해외 자본보다 경영권을 건드리지 않고 투자수익만 확보해 주면 되는 국내 연기금이 훨씬 더 수월한 대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