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겪은 범죄자에게 연기 힌트 얻어 아이러니…‘여름의 남자’ 황정민과 첫 호흡 “둘도 없는 사이 됐죠”
“감독님이 평범함 속에서 묻어 나는, 얼핏 보이는 날카로움이나 섬뜩함 같은 걸 보고 저를 캐스팅 해주신 것 같아요.”
‘배우 황정민이 납치당했다.’ 현실과 가상 사이에 절묘하게 외줄타기를 하고 있는 영화 ‘인질’에서 김재범은 황정민을 납치한 조직의 리더 최기완 역을 맡았다. 캐스팅 경쟁률은 무려 1000 대 1. 쟁쟁한 경쟁자들 사이에서 단연 ‘이 배우가 최기완이다’라는 믿음을 주었다고 했다. 선이 가늘어서 도리어 순박해 보이기까지 한 그에게서 제작진은 어떤 빌런의 향기를 맡았을까. 이 질문에 김재범은 학창시절부터 유구했던 자신의 ‘빌런’ 면모를 이야기했다.
“어릴 때부터 눈이 좀 날카롭단 얘길 많이 들었어요. 대학 때 교수님이 연기 실습 시간에 ‘재범아, 눈 그렇게 뜨지 말아라’ 하시고(웃음). 고등학교 땐 제 친구들을 찾으려고 근처 분식집을 들여다 보고 있었는데 그 안에 있던 선배님이 저 보고 빨리 오라는 거예요. 그래서 갔더니 아주 시원하게 볼 마사지를 그냥(웃음)…. 왜 이러시나 싶었는데 그분이 ‘선배를 그런 눈으로 쳐다 봐!’ 그러더라고요. 내가 이렇게 쳐다보는 게 문제가 있구나, 착하게 눈을 뜨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착한 눈으로 살고 있었는데 감독님이 다행히 숨겨진 눈빛을 봐 주셨나 봐요.”
숨길 수 없었던 눈빛 덕이었는지, 그에게 최기완은 맞춤옷을 입은 것처럼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무대에서 활동하면서도 사이코패스나 어딘지 모르게 ‘쎄한’ 캐릭터도 종종 연기해 왔던 김재범은 이번 ‘인질’ 속 최기완을 연기하는 데 있어 의욕이 너무 앞섰다는 점을 쑥스럽다는 듯이 언급하기도 했다.
“처음엔 비중 있는 악역이라는 것에 의욕이 너무 넘쳐서 ‘온 세상 악역을 다 모아서 아주 종합선물세트 같은 악역을 보여주겠다!’ 이런 생각이었어요. 그런데 감독님과 이야기하면서 이 작품이 나 혼자만 나오는 게 아니라 빌런 5인방이 나오니까, 그 다섯 명의 캐릭터가 모두 중요하단 걸 깨달았죠. 그 다섯 명과 황정민의 싸움이니까 이들이 어떻게 하면 잘 보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게 됐어요. 그러려면 캐릭터가 다 달라야 했거든요. 먼저 2인자인 염동훈(류경수 분)과의 차이점을 두려고 노력했어요. 동훈이가 불같고 동적인 아이라면 저는 얼음 같고 정적으로 움직이죠. 화를 내는 것도 단계 없이 폭발적으로 내다가 수그러드는 것도 언제 그랬냐는 듯한 모습을 연기했어요.”
그런 최기완을 연기하는 데 있어 이전의 끔찍한 경험이 조금은 도움이 됐다고도 했다. ‘최기완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한 ‘인질’ 속 김재범의 연기 방향은 다른 영화 속 유사한 캐릭터가 아니라 실재하는 범죄자들, 자신이 겪었던 사람들에게서 힌트를 얻어 뚜렷한 실체를 갖춰 나갈 수 있었다.
“제가 직접 겪은 일인데, 어느 날 새벽에 누가 저희 집 문을 막 두드렸어요. 왜 이러시냐니까 제가 자꾸 자기 이름을 부른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무슨 말씀이세요, 저는 당신의 이름을 모릅니다’ 하고 경찰을 불렀는데 통제가 안 돼요. 그러고 다음 날에 또 찾아 와서 이번엔 방충망을 커터 칼로 자르고 있는 거예요.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질렀더니 씨익 웃어요. 지금은 그냥 웃으면서 말하는 거지만 그 사람이 저희 집 앞에 불도 지른 적이 있거든요. 경찰한테 잡혀가면서도 제 우편함을 뒤져서 ‘네가 김재범이야?’ 하면서 가더라고요. 너무 무섭고 내가 왜 이런 일을 겪고 있나 싶었는데 아마 그게 운명이었나 봐요. 그래서 최기완을 만나게 됐나(웃음).”
캐릭터 구축에 성공했다면 나머지는 동료들과의 합이 채울 차례다. 김재범은 함께한 배우들 중에서도 역시 황정민과의 호흡에 엄지를 치켜 올렸다. 돈독한 친분을 보여주듯 살짝 애정 어린 ‘디스’를 담기도 했지만 그에게 있어 ‘인질’에서 황정민과 호흡을 맞춘 것은 쉽게 얻기 힘든 행운이었다고 했다.
“너무 행복했죠. 이 ‘여름의 남자’와 내가, 드디어 촬영을 같이 하겠구나(웃음). 최기완과 황정민으로서 그 순간이 너무 행복하고 또 배우로서도 즐거웠어요. 예전에 정민이 형과 뮤지컬을 같이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막 ‘연예인을 본다’는 설렘은 사실 없었거든요. 그냥 멀찍이 서서 형을 보는데 ‘생각보다 키가 크네… 다리가 너무 긴 거 아냐? 팔도 너무 길어서 땅에 닿겠다. 얼굴이 발갛구나’ 이런 생각만 하고 있었어요(웃음). 그런데 작업으로 만나면서 인간적인 면을 많이 보게 되고, 형으로서도 너무 좋고 편안한 사람으로 느껴졌던 것 같아요. 이번에 ‘인질’을 통해서는 또 둘도 없는 사이가 됐죠. 그런데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도 몰라요(웃음).”
이번 ‘인질’을 통해 김재범이란 배우를 처음 접하는 대중들도 많겠지만 그는 이미 연극‧뮤지컬 판에서 모르는 이가 없는 배우다. 2004년 뮤지컬 ‘지하철 1호선’으로 데뷔해 뮤지컬 ‘공길전’ ‘김종욱찾기’ ‘쓰릴미’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랭보’ ‘박열’ 등에 출연했고, 연극 ‘올드 위키드 송’, ‘아마데우스’ 등 쟁쟁한 작품에서 이미 연기력과 무대를 휘어 잡는 카리스마로 인정을 받았다. “다른 길이 없어서 선택한 게 이것”이라며 웃음 짓긴 했지만 연기에 대한 변함없이 진지한 마음이 김재범을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만든 것은 아닐까. 18년의 내공은 거저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저희 형 꿈이 배우였는데 저도 따라서 ‘나도 연예인이 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막연하게 아무 노력 없이 그러고 살다가 학교 연극부에 들어갔는데, 부모님이 ‘넌 안 될 것 같다. 내성적이라 힘든 걸 이겨내기 쉽지 않다’ 하셔서 평범하게 살기로 했어요. 그런데 고3 때 선생님이 대입 상담을 해주시면서 ‘넌 (이 성적으로는) 평범하게 살 수가 없다’ 하시더라고요. 아, 지금 나한테는 다른 길이 없구나, 연기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했죠(웃음). 연기학원을 거쳐 한예종에 들어가면서 본격적으로 연기를 배우게 된 거예요. 그래서 지금 여기까지 온 거죠. 저는 연기를 하는 사람이니까 오래오래 연기를 하고 싶어요. 할아버지가 돼서도 연기하는 게 제 꿈이고 목표예요. 영화도 했고 공연도 했는데 드라마는 아직 제대로 못 해봤거든요. 괜찮은 배우가 있다고 말씀 많이 드려주세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