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법조인 역할에 오디션 전 ‘리얼’ 판사들 취재…“벌써 10년차, 꼬부랑 할머니 때까지 연기하고 싶어”
“진주가 선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현실을 마주한 뒤에 변명하지 않고 빠르게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사과하잖아요? 저는 그런 태도가 너무 멋있더라고요. 저와 진주가 같은 점도 그런 건데, 저도 단체 생활을 오래 해서 그런지 제 잘못을 빨리 인정하고 다음 스텝을 밟아 나가는 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를 비교적 빠르게 배웠거든요. 반대로 다른 점이 있다면 진주가 시범재판부에서 소외됐을 때, 진주는 ‘내가 못 미더운가, 내 능력이 모자란가’ 하고 생각하는 반면 김재경이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부장판사한테 가서 ‘아 저 일 좀 주세요! 저도 껴주세요!’ 했을 거라는 거(웃음).”
‘악마판사’에서 김재경은 흙수저 출신의 시범재판부 우배석판사 오진주 역을 맡았다. 화려한 외모와 친근한 미소가 특징인 ‘미디어가 원하는 법조인’, 다시 말해 카메라가 잘 받는 판사라는 게 이 캐릭터의 아이덴티티다. 그렇다고 단순히 얼굴만 믿고 나서는 타입은 아니다. 판사로서의 능력이 모자라다는 것을 자신이 더 잘 알고 있기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자신의 지위를 활용해 더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고 싶어 하는 오지랖 넓고 속 깊은 캐릭터이기도 하다.
“진주는 엘리트 출신이 아니에요. 지방에서 태어났고 시골에서 조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열심히 공부를 하다가 판사가 된 아이라고 설정했어요. 그래서 진주는 판사로서의 야망을 갖기보단 그저 그 일을 진짜 너무 사랑해서 더 열심히 하고 싶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인 거죠. 제가 개인적으로 공감한 부분은 진주가 밤새 판례를 읽으며 공부한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다 가온이(진영 분)를 만나는데요. 둘이 대화를 나누다가 진주가 ‘나도 알아, 나 외모로 뽑힌 거. 그래도 열심히 하려고’라고 말하는 모습을 보고 진주가 정말 이 일을 열심히 하고 사랑하는구나 싶어서 공감이 많이 갔어요.”
자신이 꿈꾸는 판사의 이상에 다가가기 위해 오진주가 노력한 만큼, 배우 김재경도 오진주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미디어가 사랑하는 판사’라는 설정답게 이 드라마에서 가장 컬러풀하면서도 화려한 비주얼을 뽐낸 오진주의 외관엔 김재경의 아이디어도 큰 몫을 했다고 했다.
“오디션 단계부터 내가 진주라면 이런 상황에 이런 옷을 입을 것 같다고 생각한 자료를 스크랩하고 PPT로 만들어서 진주의 TPO(Time Place Occasion·시간 장소 상황에 맞는 옷차림)를 정했어요. 캐스팅 확정이 되고 나서는 스타일리스트 언니에게 넘겨서 매 신마다 어떤 옷을 입을지도 세밀하게 정했죠. 화려한 비주얼, 미디어의 관심을 즐기는 그런 수식어가 시놉시스에 있더라고요. 그걸 과감한 컬러 선택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상하의를 모두 코럴이나 핑크 컬러로 입는다든지(웃음). 눈치 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진주가 중간에 입는 트레이닝복은 제가 직접 제작한 거예요! 긴즈버그(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를 정말 존경해서 긴즈버그의 멘트나 얼굴이 그려진 옷을 입고 있죠(웃음).”
외관이 완벽하더라도 그 캐릭터를 속속들이 연구하지 않으면 시청자가 공감할 리얼리티를 살릴 수 없다. 가장 큰 난관은 역시 단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판사’ 역할을 어떻게 해야 이질감 없이 자연스럽게 연기하느냐였다고. 결국 맨땅에 헤딩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제가 생각해 보니까 이제까지 판사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거예요. 오디션 과정 때부터 주변에 아는 판사님 없냐고 수소문해서 운 좋게 오랜 기간 판사로 활동하신 분과, 저랑 비슷한 또래의 판사 분을 만나 굉장히 상세히 인터뷰한 뒤 오디션을 봤죠. 그때 재판부는 부장판사와 우배석, 좌배석 판사들의 수평적인 구조라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개인 의견보단 법을 토대로 판결하는 직업이라 수평적으로 법 의견을 제시한대요. 소통을 많이 한다는 그룹이란 걸 알게 되면서 최대한 가온, 요한과 소통을 많이 하는 모습을 보이려고 했죠.”
시범재판부에서 함께한 부장판사 강요한(지성 분)과 좌배석판사 김가온(진영 분), 그리고 작품의 메인 빌런인 사회적 책임재단 정선아 이사(김민정 분)와의 좋은 케미스트리도 이 같은 김재경의 끊임없는 캐릭터 연구와 공부가 한몫했다. 모든 주·조연 배우들과는 ‘악마판사’에서 첫 호흡이었지만 그 덕에 마치 오랜 시간을 알아 온 사람들처럼 빠르게 가까워졌다는 게 김재경의 이야기다.
“틈 날 때마다 소통하고, 고민도 함께 나누는 정말 든든한 현장이었어요. 지성 선배님은 대선배님으로서 제가 볼 수 없는 시야까지 바라보면서 조언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진주가 요한에게 그랬듯이 저도 선배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갔죠(웃음). 진영이는 저와 비슷한 삶의 과정을 거쳤고 연기 시작점도 비슷해서 서로 고민하는 부분도 같았어요. 그런 만큼 서로 조언도 많이 해줬고요. 또 김민정 선배님이 맡으신 선아의 카리스마에 진주가 ‘심쿵!’ 하는 장면들이 좀 있었죠(웃음). 선배님이 베테랑이셔서 그런지 그런 케미스트리를 만드는 것을 잘 아셨던 것 같아요. 같이 리허설 때 다양하게 연기를 주고받고 하면서 서로 잘 맞는 케미를 찾았거든요. 그런 게 너무 좋았죠.”
‘악마판사’를 통해 김재경은 배우로서의 목적지를 향한 한 계단을 올라섰다. 온전한 성장이라고 자평하기엔 여전히 부족함이 많이 보인다고 고개를 저었지만 대중들은 확실히 김재경의 또 다른 가능성을 목격했다. 그런 반짝임이 모여서 스스로를 한 사람의 배우라고 자신 있게 소개할 날을 앞당길 수 있지 않을까.
“저는 연기가 일단 너무 재밌어요. 매 순간이 새롭고, 내게 늘 새로운 챌린지가 열리는 것 같아서 그걸 하나하나 돌파해 나가는 게 너무 즐겁거든요. 모두가 오케스트라처럼 함께 하나의 곡을 연주해 나가는 그 작업이 너무 좋아요. 그런 재미로 지금까지 열심히 해온 것 같고요. 지금도 상상해요. 꼬부랑 할머니, 백발 할머니가 됐는데 그때도 재미있어서 일을 한다면 진짜 행복한 삶이겠다(웃음). 지난 10년 재미있게 살았으니까 이런 멋진 작품도 만날 수 있었던 거고, 앞으로 또 재미있게 살면 또 다른 재미있는 작품이 기다리고 있겠지? 그렇게 기대하고 살고 있어요. ‘더 재미있게 살자!’ 이게 제 스스로에게 늘 하는 말이에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