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녹’ ‘밀촬’ 간부들끼리 공유, 일부 팬 배척, 공금 유용 의혹도…신규 팬들 “소속사가 나서야”
그동안의 인연을 생각해서 스타가 제대로 선을 긋지 못할 때 대신 중심을 잡아야 할 소속사도 이 관계에 휘둘려 팬들 사이에 내분을 일으키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매번 유사한 일이 벌어질 때마다 팬들은 “소속사가 공식 팬 커뮤니티를 직접 관리하고 스타와 팬 사이의 거리를 조절하라”고 요구해 왔지만, 소속사는 “팬덤 관리를 위해서는 직원만의 힘으로는 부족하고 직접 팬과 소통이 가능한 연차 높은 팬의 도움을 일정 부분 받을 수밖에 없다”고 난색을 표했다.
최근 이런 해프닝으로 2020 도쿄올림픽을 감동의 드라마로 완성시킨 배구선수 김연경의 팬덤이 대중들의 눈길을 끌었다. 트위터에서 ‘#김연경은_만인의_사람이다’라는 해시태그 운동이 벌어졌던 그 배경에는 정도를 모르고 선수와의 거리를 좁혔던 이른바 ‘고인물’(커뮤니티에서 오래 전부터 활동해 온 회원을 일컫는 속어) 팬들의 행태가 있었다는 게 이 운동을 이끌었던 다른 팬들의 이야기다.
8월 22일 김연경 팬 연합은 두 차례에 걸쳐 성명을 내고 김연경의 소속사인 라이언앳에 팬 커뮤니티 관리에 대한 제대로 된 대책을 요구했다. 오랜 기간 운영돼 오면서 김연경의 공식 팬 커뮤니티로 공인된 ‘연경홀릭’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고인물 팬들의 도가 지나친 행태를 소속사가 시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연합 측은 ‘연경홀릭’ 내에서 벌어진 △일부 팬들의 선수에 대한 막말 △선수의 사적 스케줄 또는 비공개 사진 유출 △서포터즈 가입비 및 모금, 행사 비용 유용 의혹 △연경홀릭 소속이 아닌 팬들에 대한 배척 △극소수 팬들에게만 기준 없이 허용되는 팬성 이벤트 등을 지적하고 나섰다.
이 가운데 특히 팬 출신으로 알려진 김연경의 스타일리스트가 소속사에게 알리지 않고 선수의 비공개 사진을 일부 팬들만이 볼 수 있는 채팅방에 지속적으로 유출해 왔다는 사실을 두고 “소속사 차원에서 이 스타일리스트를 교체하고 스태프들에 대한 엄중한 대응이 필요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공사 구분을 제대로 하지 않고 스태프의 자격으로 얻을 수 있는 비공개 자료들을 계속해서 유출해 왔다는 것을 두고 소속사가 직원 교육은 물론, 선수에 대한 보호도 제대로 하고 있지 않다는 비판이었다.
선수를 향한 일부 팬들의 막말 영상도 SNS(소셜미디어)와 대형 온라인 커뮤니티를 타고 퍼지면서 대중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은 모두 연경홀릭 소속 연차가 높은 팬들로 영상에는 선수의 코앞에서 외모를 비하하거나 모욕적인 말을 던지고는 “이렇게 막말하는 팬이 생길 줄 알았나”라며 약을 올리는 모습까지 담겨 있다. 또 팬성 이벤트 등에서도 연차가 낮거나 고인물과 친목이 없는 팬들은 배제하고 팬카페 가입 연도가 높은 팬들끼리만 정보를 공유해 왔다는 폭로도 이어졌다. 이에 스포츠 팬들은 물론, 비슷한 사례를 겪어본 적이 있는 아이돌 팬들 사이에서도 함께 분노하는 기류가 형성되기도 했다.
결국 김연경의 소속사 라이언앳 측이 입장문을 내고 “선수의 팬 증가와 함께 여러 문제가 있음을 인정하고 현재 운영되고 있는 다음 카페가 아닌 새로운 소통 플랫폼의 ‘연경홀릭’을 최대한 빨리 제작하겠다”며 “관리 및 운영은 소속사에서 직접 관여하고 신규 운영진 구성과 장기적인 미팅을 진행할 예정”이라며 급한 불을 끄는 모양새를 보였다. 또 선수의 팬 출신인 스타일리스트의 논란에 대해서도 “전 직원에게 직업윤리 교육을 시행하고 선수 보호를 위해 인력을 충원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문제가 된 고인물 팬들도 각자 사과문을 올렸으나 팬 연합 측은 제대로 된 공식 팬 커뮤니티의 운영이 자리 잡을 때까지 계속해서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김연경 팬덤의 논란과 유사한 사례는 8월 16일 배우 조승우의 팬덤에서도 발생했다. 배우의 오랜 팬들이 모인 커뮤니티 ‘위드승우’에서 촬영이 허가되지 않은 작품이나 무대 인사 등의 촬영 및 녹음본이 공유됐고, 이를 소속사가 묵인하거나 해당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일부 팬에게만 관련 정보를 제공해 왔다는 폭로가 제기됐다. ‘밀녹’ 또는 ‘밀촬’이라고 불리는 이런 불법 영상이나 음성은 해당 커뮤니티의 회원들에게만 배포됐다는 게 이를 비판하는 팬들의 주장이었다. 일부 자료는 회원들 가운데 커뮤니티 운영을 위해 후원금을 낸 이들에게만 공개되기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문제의 커뮤니티는 배우가 직접 “무명일 때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응원해 준 팬들”이라고 언급할 정도로 배우와의 끈끈한 인연을 자랑해 온 곳이다. 배우와 함께 성장해 온 커뮤니티이고 배우 역시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만큼 오랜 시간 운영되며 소속사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영향력 때문에 커뮤니티 내에서 정화되지 않는 고인물 팬들의 일탈을 소속사가 암묵적으로 용인해 온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이번 폭로를 통해 제기되기도 했다.
다만 소속사 측은 커뮤니티 내에서의 이런 행위에 대해 알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승우의 소속사 굿맨스토리 측은 “최근에 해당 문제를 인지했다. 추후 모니터링을 통해 옳지 않은 일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관련 내용에 대해서도 지속적으로 제보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문제의 커뮤니티인 위드승우는 논란이 불거지자 자료를 모두 삭제하고 폐쇄된 상태다.
이처럼 한 달 새 연이어 불거진 팬 커뮤니티 내부 논란과 관련해 업계 관계자들은 “소속사가 정확히 선을 그어 놓고 팬들을 대해야 맞지만, 체계적인 팬덤 관리 시스템이 아예 없거나 소속사보다 팬덤의 입김이 센 경우에는 휘둘릴 수밖에 없는 구조 탓에 자정이 이뤄지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형 소속사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이런 문제가 팬덤의 힘을 도움닫기로 성장한 소규모 소속사에서 계속 발생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엔터테인먼트사 팬덤 대응 담당자는 “소규모 소속사는 팬들을 모두 관리할 능력이 없어 팬덤 내 연차가 높거나 운영진 등 완장을 찬 팬들에게 소속사가 해야 할 역할을 대신 맡기는 경우가 많다”며 “자연스럽게 소속사 관계자들과 긴밀한 소통을 할 수 있는 것도 이런 일부의 특수 팬들이기 때문에 팬들 사이에서도 계급이 나눠지고, 차별 문제가 빈번하게 발생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스타들의 개인적인 스케줄이나 심지어 팬 이벤트 정보도 이런 일부 팬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경우가 잦아 일반 팬들과의 형평성이 어긋난다는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지적이다.
이 담당자는 이어 “데뷔 때부터 함께해 왔으니까, 어려울 때도 함께해 줬으니까라는 인정적인 이유만으로 이를 계속 묵인해 왔기 때문에 신규 팬들의 유입은 줄고 고인물들의 행패는 심해지면서 오히려 스타의 이름에 먹칠을 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구조적으로 다소 어렵더라도 소속사가 직접 팬 커뮤니티를 운영하거나 공식 창구를 일원화해야 이런 문제가 잦아들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