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신원불명 환자 피하기, 복지부-진료비 상환 동분서주, 환자-진료거부 여전해 분통
▲ 부실한 응급의료체계를 개선하고자 복지부가 도입한 ‘응급의료 미수금 대불제도’. 그러나 이 제도는 ‘환자-병원-복지부’ 삼자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있는 실정이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취지는 좋았다. 여러 사정으로 인해 응급 진료비를 지불하지 못하는 환자에게 충분한 상환 기간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긴급한 사정으로 응급실을 찾았으나 당장 치료비를 지불할 수 없는 상황일 경우, 환자는 의료기관에 응급의료비 미수금대불제도를 이용하고 싶다는 의사를 전할 수 있다. 본인의 신분을 밝히고 응급진료비 미납 확인서를 작성, 사인만 하면 된다.
응급의료 대불제도를 이용한 환자의 진료비는 1차적으로 해당 의료기관이 부담한다. 병원은 진료 당시 환자에게 지불능력과 보호자가 없었고, 이에 적절한 응급 치료를 했다는 증빙 서류를 구비해 건강보험심사평가원(심평원)에 심사를 청구한다. 심평원은 절차와 진료의 적정성을 확인한 뒤 응급의료비용을 의료기관에 납부한다. 그렇다고 환자의 지불 의무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환자는 최장 12개월에 걸쳐 응급진료비를 심평원에 분할 납부할 수 있다. 환자 또는 대납 의무자가 비용을 상환하지 않을 경우 심평원은 재산 상황 등을 파악해 상환소송을 제기한다.
문제는 적지 않은 응급실 환자가 의식이 없거나 신원불명이란 점이다. 때문에 병원에선 응급진료비 미납확인서 등 제출 서류를 구비하기 어렵다. 경찰서에 신분 확인을 의뢰하고 환자의 집까지 찾아가는 등의 수고를 필요로 한다. 수소문 끝에 어렵사리 서류를 제출해도 심평원으로부터 진료비를 대불받기까지 평균 3개월의 기간이 걸린다.
이뿐만이 아니다. 심평원은 의료기관이 응급의료를 받은 환자의 주민등록번호를 확인하지 못했을 때 대불청구를 반려하고 있다. 응급진료의 특성상 결국 환자의 진료비용 대부분이 고스란히 병원의 부담으로 돌아오고 만다.
한 대학병원 관계자는 “이 제도를 이용하는 환자들 중엔 주민등록번호를 허위로 기재하거나 진료를 받은 뒤 무단퇴원을 하는 경우가 많다. ‘무상으로 의료비를 지원해주는 줄 알았더니 왜 진료비를 지불하란 청구서가 날라 왔느냐’는 항의 전화도 많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 “절차가 까다로워 대부분의 병원들이 대불제도를 설명하길 꺼린다. 게다가 신원불명 환자의 경우 심평원이 진료비용을 지급하지 않기 때문에 병원에서 보호자 없는 응급환자의 진료를 거부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고 덧붙였다.
병원에선 환자의 신원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을 거듭했으나 계속 난관에 부딪치고 있다. 한 병원이 응급실에 온 환자의 CCTV 영상을 증거로 제출했지만 심평원은 “CCTV에 환자임을 확인할 수 있는 음성 자료가 없기 때문에 대불할 수 없다”며 지급을 거부한 적도 있다.
일각에서는 미진한 응급의료비 대불금 상환액수로 인해 재정 부담을 느끼는 심평원이 병원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한다는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응급의료에 관한 법률 제22조 5항에 따르면 심평원은 환자로부터 진료비를 상환받기 어려울 때 결손처분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심평원 측에선 “신원미상 환자 비용을 우리가 떠안아야 한다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외면하고 있다.
2010년 응급의료기관들이 정부에 요구한 대불금 신청액수는 29억 6400만 원(7584건). 2009년 26억 2800만 원(6216건)보다 늘어난 수치다. 그러나 정작 정부의 보상 수준은 2009년 25억 7300만 원(4698건)에서 2010년 14억 3900만 원(4618건)으로 1년 사이 무려 절반 가까이 줄었다. 2011년 응급의료대불제도에 할당된 예산은 약 23억 원. 이는 정부가 마련한 응급의료기금 예산의 5%에도 못 미치는 금액이다.
사실 심평원 역시 이 제도 때문에 골머리를 앓긴 마찬가지다. 환자로부터 진료비를 받아내기 어렵기 때문. 심평원 관계자는 “환자들의 응급진료비 상환율이 10%도 안 된다. 이 제도를 이용하는 이들 대부분이 지불능력이 없는 환자들이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환은 꿈도 못 꾼다. 최악의 경우 지급명령을 신청하거나 완력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회의감이 몰려온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러한 문제가 반복되자 2년 전부터 복지부-심평원-의료기관이 한 자리에 모여 회의를 거듭했지만 결국 아무런 해답도 얻지 못했다고 한다. 대한병원협회 관계자는 “이 제도가 ‘대불’의 성격을 유지하는 한 이러한 문제는 절대 해결되지 않는다”면서 “차라리 기금 성격으로 전환해 복지의 일환으로 운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애초에 대불제도도 어려운 이들을 도와주기 위해 만든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그러나 복지부에선 기금 형식으로 전환하는 것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지불 능력이 있는 환자가 이 제도를 악용해 무료로 응급진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 이러한 ‘도덕적 해이’가 계속될 경우 실제 지불능력이 없는 환자들이 혜택을 받지 못한 채 기금이 바닥나버릴 수 있다.
해답 없는 응급의료대불제도는 현재 의료기관-심평원-환자 모두에게 피해를 주고 있다. 의료기관은 응급실에 보호자 없는 신원불명 환자가 실려 올 때마다 진료비 부담을 놓고 고민을 하고 있고, 심평원은 환자로부터 진료비를 상환받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으며, 형편이 어려운 환자는 찾아가는 응급실마다 진료를 거부해 분통이 터지고 있는 상황이다.
한 의료기관 관계자는 “응급환자의 경우 적절한 조치가 늦어지면 심각한 후유증은 물론 생명까지 위협할 수 있다”면서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잘못된, 그리고 부실한 응급의료체계가 유지되는 한 응급환자의 생명은 더욱 더 위험해질 것”이라고 꼬집었다.
정유진 기자 kkyy1225@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