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령이라니? 경 회장 부인 건보료 등으로 썼다”
▲ 맨 위는 구 씨가 제시한 와인대금 차액 거래내역서. 경 회장 부인인 김 관장의 건강보험료 등 결제내역이 나와 있다. 아래는 경 회장 등 협회 임원들이 친필 사인한 와인 등 설 선물 구매 결재서류와 아트센터마노의 와인판매매출 보고서. |
꼬리를 문 논란은 지난해 말 대한의사협회 정기감사에서부터 시작됐다. 의협이 지난해 2월 설 선물로 와인을 대량 구매하는 과정에서 실제 가격의 두 배를 더 부풀려 예산을 집행했다는 의혹이 제기된 것이다.
감사 결과에 따르면 의협 회장 비서실에서는 지난해 설날 선물용으로 3000만 원을 들여 프랑스산 와인 ‘샤트레인 쌩 마리’와 ‘샤트레인 몽페랑’을 각각 750병씩 구입하고, 포장용기 750개도 별도로 구매했다. 이러한 계산 대로라면 와인 한 세트당 포장 값을 포함해 4만 원을 지불한 셈이다. 그러나 이 와인은 시중에서 포장용기를 포함해도 세트당 1만 3000원에 거래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때까지만 해도 의협이 한 주류 도매업체에 사기를 당해 비싼 값을 치르고 와인을 구매했을 가능성도 존재했다. 그러나 거래내역서에 적힌 와인 도매 업체의 상호는 ‘A.C.M’이란 약자뿐이었고 국내에 해당 상호를 쓰는 업체는 한 군데도 없었다. 더욱이 의협은 와인 대금을 업체가 아닌 최 아무개 씨 개인 계좌로 송금한 것으로 드러났다. 와인 대금을 받은 사람의 소속이 드러나며 거래업체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렸다. 최 씨는 경 회장 부인 김 아무개 씨가 관장으로 있는 아트센터마노의 직원이었다. 상호의 경우 첫 알파벳만 딴 셈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경 회장이 설날 선물 구입을 명분으로 부인과 짜고 협회의 돈을 횡령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의료계 내에 일파만파 퍼졌다. 의협 측은 논란이 계속되자 내부 조사를 통해 명확한 책임자를 밝혀낼 것이라 예고했다. 며칠 후 와인 거래에 참여한 비서팀장이 “아트센터마노 직원이었던 구 아무개 씨가 먼저 접근해 와인을 싸게 구매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고 해 그 말만 믿고 맡겼다 이렇게 된 것”이라고 진술하며 구 씨에게 시선이 쏠렸다. 와인 대금을 송금 받은 최 씨 역시 “아무것도 모른다. 구 씨의 부탁을 받고 계좌번호를 불러준 것밖에 없고 이후 3000만 원을 현금으로 인출해 그에게 건네줬다”고 밝혔다.
결국 사건은 구 씨의 단독범행 쪽으로 무게가 쏠렸다. 구 씨는 아트센터마노 설립 당시부터 경 회장 부부와 인연을 맺고 10년여 동안 근무한 사람이었다. 아내 김 씨가 요양병원 대표로 나섰을 때도 공사과정에 참여했다. 그랬던 그가 와인 사건이 불거지기 3개월 전 이미 회사를 그만둔 상황이라는 것도 의협 측의 논리에 힘을 실었다. 아트센터마노 측은 “구 씨는 올해 초 경 회장 부인 김 씨의 명의로 요양원을 설립하는 과정에도 참여해 수억 원을 횡령한 혐의로 내부 감사를 받고 있던 자”라고 덧붙였다.
당시만 해도 와인사건은 이렇게 마무리되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한 달 후 구 씨가 기자회견을 계획하며 진실게임 양상으로 옮겨갔다. 그는 의료 관련 언론매체를 통해 경 회장 부부가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자신을 희생양으로 삼고 있고 그동안의 일들을 증명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그러나 그는 기자회견이 열리는 날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오랜 시간 의협 측과 대립관계인 것으로 알려진 노환규 전국의사총연합회 대표가 그의 입장을 전달했는데 의문은 완벽하게 해소되지 못했다.
되레 기자회견 당일 의협 측이 그를 사기혐의로 서울남부지검에 고소했다. 경 회장은 협회 회원들에게 서신을 보내 “단순히 비용을 절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뿐 문제가 생기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며 “사실관계를 확인해본 결과 아트센터마노 직원 구 씨가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와인을 구입해 의협에 납품한 데서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또 “아트센터마노는 도매업체가 아니어서 와인 납품을 할 수 없음에도 구 씨는 이러한 사실을 비서팀장에게 알려주지 않은 채 와인을 구입하여 차익을 남기며 의협에 납품했음이 드러났다”고 고소 배경에 대해 설명했다.
이에 대해 구 씨 역시 5월 13일 경 회장을 무고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그동안 직접적으로 입장을 드러내지 않았던 구 씨는 지난 5월 25일 기자와 만나 “오랜 시간 모셨던 상사에 대한 신의 때문에 끝내 기자회견장에 나갈 수 없었다”며 “자신들의 잘못을 덮기 위해 실명까지 거론하고 거짓 혐의 내용까지 공표하는 상황에서 개인의 명예훼손이 너무 심각하다고 생각돼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는 또 “기자회견이 예정된 날 의협 임원으로부터 ‘와인 건은 좁은 소견으로 법적 책임을 질 일은 아니다’는 이메일도 받았다”고 보탰다.
구 씨가 밝힌 정황은 의협 측의 주장과 상반된 것이었다. 그는 “설 선물을 와인으로 정한 것도, 아트센터마노에서 와인을 의협 측에 팔기로 결정한 것도 경 회장 부부 두 사람의 의지였단 증거가 있다”며 “김 관장이 비서팀장의 연락처를 주며 ‘이야기를 해놨으니 거래를 하라’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김 관장은 주류의 경우 음식점이 아니면 대량구매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아트센터마노 내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서 대리 구입한 후 마진을 남겨 의협 측과 거래할 것을 지시했다는 것이다.
구 씨는 이후 의협 비서팀장과 전화통화를 했다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비서팀장은 ‘회장 부인이 근무하는 아트센터마노에서 와인을 구매한 것으로 드러나면 오해가 생길 수 있다’며 ‘사업자등록증과 세금계산서, 견적서에는 상호를 가려야 한다’고 제안했다는 것. 구 씨는 “판매 업체를 완전히 가린 상태에서 거래를 해야 한다는 의협 측의 논리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김 관장의 지시였기 때문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이상한 점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고 한다. 아트센터마노 내 간이사업체와 와인 거래를 한 것으로 처리해 세금계산서 발행 의무 역시 피했다는 것이다.
구 씨는 최 씨가 주장하듯 의협으로부터 과다 계상된 와인대금 3000만 원을 현금으로 건네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횡령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와인 대금을 치르고 남은 차액 1466만 650원은 다시 아트센터마노의 밀린 관리비와 김 관장의 몫으로 돌아가도록 지시받았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자신은 중간에서 김 관장의 개입을 숨길 수 있는 운반책 역할만 했다는 것이다. 그는 “(지난해) 3월 10일 현금을 계좌에 입금한 후 인터넷 거래를 통해 하루 만에 해당 금액을 모두 썼다”며 해당 거래내역서를 공개했다. 내역서에는 그의 주장대로 하루 동안 김 관장의 건강보험료, 아트센터마노 내 레스토랑 운영 목적으로 구매한 식재료 매매대금, 가스비 등 차액에 대한 결제내역이 나와 있었다.
경 회장 측이 와인 구매 절차에 대해 알지 못했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구 씨는 “해당 와인 대금 3000만 원을 최 아무개 씨 개인 계좌로 송금했다는 것이 적시된 결재서류를 가지고 있다”면서 “정상적인 절차대로라면 협회 예산 결제시 와인회사 측과 주고받은 송금 내역, 이에 대한 세금 계산서까지 정산에 대한 근거로 첨부돼 보고해야 한다. 결재서류에는 회장, 사무총장, 총무이사, 상근부회장의 서명까지 각자의 친필로 기록돼 있다. 경 회장 측이 와인 구매 절차를 몰랐다고 볼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자신이 퇴사한 이유가 요양병원 설립 때 공사대금을 횡령한 혐의 때문이라는 아트센터마노 측의 논리 역시 반박했다. 그는 “2011년 1월 요양병원 건립 중 갑작스레 설계가 변경된 부분 때문에 기존에 예상했던 공사금액보다 수억 원이 더 들었다”며 “애초 예상보다 공사대금이 수억 원 더 들었단 점을 근거로 현장사무실 직원들을 상대로 내부 감사가 시작됐지만 결국 오해로 밝혀졌다”고 말했다. 그는 공사거래대금에 관한 부분은 전부 영수증과 거래명세서가 남아 있고 투명하게 회계처리돼 있기 때문에 횡령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내부에서 알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이번 일이 불거지자 갑작스레 해당 감사는 자신을 겨냥한 것이었고 아직 조사 중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는 올해 초 퇴사한 이유에 대해 감사에 대한 부담이 아닌 전후사정을 알아보지 않고 먼저 직원들부터 범죄자로 몬 배신감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구 씨는 올 1월 초 횡령의 오해를 완벽히 벗고 두 달가량 전임자에게 인수인계를 한 후 퇴사했는데 이런 날벼락을 맞았다는 것. 구 씨는 “증거가 확실하기 때문에 승소하는 것은 어렵지 않는 일”이라며 “다만 사기혐의의 경우 최종 재판까지 최소 7개월 이상이 걸리는데 누가 실추된 명예를 회복시켜 줄 수 있겠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편 이러한 구 씨의 주장에 대해 아트센터마노 관계자는 “의협 측과 팽팽한 법적 갈등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구체적인 정황을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며 구체적인 답변을 거절했다. 의협 측은 “아트센터 내에서 자금 관리를 도맡아 했던 구 씨가 의논 없이 혼자 구상한 범죄”라는 주장을 거듭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