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흔드는 깊은 울림…‘나만 가수다’
▲ MBC <우리들의 일밤> ‘나는 가수다’ 코너에서 남진의 ‘빈잔’을 편곡해 열창하는 임재범. 사진제공=MBC |
요즘 임재범은 선봉에 서서 MBC 일요 예능 프로그램의 부활을 일궈낸 인물이다. 탈진에 감기, 여기에 맹장수술까지 겹친 상황에서도 그는 “비겁하고 싶지 않다”며 방송 출연을 강행했다.
90년대 가요계에서 활동했던 한 전직 기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며 “방송 펑크는 기본이고 몇 년 만에 새 앨범을 발표하자마자 잠적해버리곤 했던 그가 이제는 폐지 논란에 휘말린 예능 프로그램을 구해낸 영웅이 됐다”며 헛헛한 웃음을 보일 정도다.
한 가요기획사 대표는 매니저로 한창 활동할 당시인 90년대를 회상하며 “임재범이 1위 후보에 오른 곡 ‘너를 위해’를 들고 <뮤직뱅크>에 출연하는 게 아닌지 조마조마했다”고 얘기한다. 그 까닭은 11년 전인 2000년 임재범이 ‘너를 위해’가 담긴 4집 앨범 <Story of Two Years(2년간의 이야기)>를 발매했을 당시를 기억하고 있어서다.
새 앨범이 나오면 가수들은 음악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본격적인 방송 활동에 나선다. 또한 인터뷰 등 홍보 활동에도 열심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당시 임재범은 2년여 만에 4집 앨범을 발표했지만 음반만 내놓은 채 사라져 버렸다. 그렇지만 임재범이 사라져버린 상황에서도 ‘너를 위해’는 그해 엄청난 사랑을 받으며 명곡의 반열에 올랐다.
임재범이라는 가수가 당시 가요 관계자들에게 가장 뚜렷하게 각인시킨 단어는 ‘잠적’이다. 지난 97년 가요계를 은퇴하겠다며 입산해버린 임재범은 다음해 3집 앨범 <고해>를 발표했다. 그렇지만 음반만 내놓고 잠적한 그는 2년 뒤인 2000년 4집 앨범 <Story of Two Years(2년간의 이야기)>를 내놓고 또 다시 잠적했다. 당시 매스컴은 임재범을 ‘방랑 병’과 ‘노래 병’을 동시에 앓고 있는 가요계 가객(歌客)이라 소개하고 있다.
2011년, 다시 대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며 가요계의 중심으로 돌아온 임재범. 지금까지의 모습만 놓고 보면 이제 그에게 ‘방랑 병’은 오간데 없고 ‘노래 병’만 남아 있는 것 같다.
86년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밴드 시나위의 보컬로 가요계에 데뷔한 임재범은 곧 군에 입대하면서 대중들에게서 멀어졌다. 그가 다시 가요계로 돌아온 것은 91년. 솔로 앨범 <이 밤이 지나면>을 들고 가요계로 돌아온 임재범은 5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그렇지만 솔로 데뷔는 기행의 시작이기도 했다. 후배를 폭행하는 사고 등 다양한 사건 사고로 구설수에 올랐던 임재범은 93년 더 큰 사건에 휘말려 공중파 방송사의 출연규제대상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임재범을 둘러싼 다양한 루머가 양산된 것 역시 이즈음 그가 보인 행보 때문이다.
그렇게 5년여의 공백 기간 동안 방황과 좌절의 나날을 보낸 임재범은 97년 2집 앨범을 발표했고 수록곡 ‘그대는 어디에’가 큰 사랑을 받으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렇지만 임재범은 갑작스런 입산으로 사실상의 은퇴 선언을 하고 잠적했다. 이때부터 그의 잠적과 음반 발매 되풀이가 시작됐다.
너무 감수성이 예민한 천재였기 때문일까. 지난날 그의 기행과 방황이 무슨 이유 때문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렇지만 2001년 충격적인 소식이 알려지면서 임재범은 다시 한 번 이슈메이커가 된다. 시작은 당시 절정의 인기스타였던 손지창이 임재범의 이복동생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이다. 2001년 1월 손지창은 자신이 왕년의 인기 아나운서 임택근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매스컴에 발표했다. 손지창의 모친은 70년대 미스코리아 충북 출신으로 임 아나운서와의 사이에서 손지창을 낳았다. 그렇지만 손지창은 부친인 임 아나운서의 호적이 아닌 이모부의 호적에 입적되면서 임 씨가 아닌 손 씨가 됐다. 당시 손지창은 “아버지(임택근 아나운서)와 형(임재범)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였지만 왕래는 전혀 없었다”고 밝히며 “한 달 전 즈음 처음으로 삼부자가 상봉했으며 얼마 전엔 아내(배우 오연수)와 함께 아버지의 집에 들러 예비 형수(뮤지컬 배우 송남영)와도 인사를 나눴다”고 밝혔다.
당시 작은 오해도 있었다. ‘임’ 씨인 임재범은 인기 아나운서인 아버지 밑에서 잘 자랐는데 반해 ‘손’ 씨인 손지창은 사생아로 어렵게 자랐을 것이라는 것. 실제 손지창은 사생아인 까닭에 군을 면제받기도 했다. 그렇지만 이는 오해일 뿐이다. 임재범 역시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냈다. 당시 손지창 역시 매스컴과의 인터뷰에서 이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괴팍하다는 소문과는 달리 다정다감했고 너무 순박해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점이 아쉬웠다”며 “어찌 보면 형은 나보다 더 많은 고생을 했다. 아버지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 방황도 많이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힌 것.
최근 네티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된 ‘블랙신드롬’ 보컬 박영철의 자전적 수필에는 임재범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이 담겨 있다. 박영철은 수필에 “임재범은 어릴 적 고아원에 맡겨져 자랐고 그 뒤 할머니의 손에 컸다”는 내용과 함께 “그런 유년 시절 때문에 임재범은 늘 불안하고 괴팍했다”고 적었다.
연예계에서 높은 인기를 끌었던 부친에 대한 원망 때문인지, 임재범은 분명 빼어난 가창력을 가진 가수였지만 연예인이 돼 연예계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는지도 모른다.
임재범이 또 한 번 가요계에서 화제가 됐던 것은 5집 앨범 <공존(Coexistance)>을 발표한 2004년이다. 4년여 만에 앨범을 발매한 그는 새 앨범을 소개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음반만 발표하곤 잠적해버리기 일쑤였던 그가 데뷔 이후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연 것. 게다가 이날 기자회견에 나타난 임재범은 과거의 트러블메이커가 아닌 상당히 부드러운 모습이었다.
그가 변화한 것은 가정의 힘이었다. “이번 앨범을 발표하는 데 4년이나 걸렸는데 애 키우고 가정에 충실하느라 그랬다”고 말하며 세 살짜리 딸 사진을 보여줬을 정도다. 잠적을 거듭하던 시절 임재범은 삭발을 하고 출가를 도모하기도 했었다. 이런 임재범이 달라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결혼과 육아’, 평범한 가정생활이었다. 임재범은 2001년 뮤지컬 배우 송남영과 결혼했다.
2011년 임재범은 ‘나가수’를 통해 다시 대중들 앞에 섰다. 잠적을 일삼던 그가 이젠 아픈 몸을 이끌고, 담당 의사의 반대까지 무릅쓴 채 방송 무대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 ‘나가수’에 출연하며 임재범은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최근 몇 년 동안의 이야기를 고백했다. 부인 송남영의 암 투병, 경제적인 어려움, 그리고 딸에 대한 미안함 등을 털어놔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다. 다른 ‘나가수’ 출연 가수들이 이런 사생활 관련 언급을 전혀 하지 않고 있는데 반해 임재범만 유일하게 ‘나가수’에 출연하게 된 사연을 들려줬다. 사생활에 대한 언급을 극도로 피하며 이를 위해 잠적을 일삼았던 과거의 임재범이 아닌 새로운 임재범이 시청자들 앞에 선 것이다.
비록 경제적으로 어렵고 부인이 암 투병을 하는 등 가슴 아픈 가정사지만 임재범에겐 분명히 지켜야 할 무언가가 비로소 생겨난 것일까. 그가 혼신을 다해 노래하는 이유 역시 가족을 지키려 하는 쉰을 바라보는 가장의 혼신 때문인 지도 모른다. 그렇게 가수 임재범은 데뷔 26년여 만에 비로소 대중들 앞에 올곧게 섰다. 힘겹게 ‘방랑 병’을 극복한 그가 더욱 깊어질 ‘노래 병’으로 대중들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 주길 기대해 본다.
신민섭 기자 leady@ilyo.co.kr
한국 가요사에서 임재범이란
한국 헤비메탈의 ‘큰형’
김태원 김종서 서태지 유현상 이승철 이승환 등은 모두 한국형 헤비메탈 그룹이 배출해낸 스타들이다. 김태원과 이승철은 부활 출신이며 김종서와 서태지는 시나위, 유현상은 백두산, 그리고 이승환은 한국 외국어대학교 메탈 밴드의 리드 보컬 출신이다. 당시 활동했던 시나위의 신대철, 부활의 김태원, 백두산의 김도균 등은 한국 헤비메탈계의 전설적인 3대 기타리스트로 불리고 있다. 이들로 인해 80년대 중반 소위 ‘파고다 시절’이 시작됐다. 종로3가 파고다 극장을 메카로 한국형 헤비메탈 그룹이 붐을 이룬 것. 지금은 실력파로 인정받는 이들이 당시엔 무명 밴드 소속으로 파고다 극장을 누볐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돋보이는 보컬리스트는 단연 시나위의 임재범이었다. 게다가 임재범은 한국 헤비메탈의 문을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한국 헤비메탈의 효시는 ‘록의 대부’ 신중현의 아들인 신대철이 이끈 밴드 시나위였다. 86년 그룹 시나위는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곡인 ‘크게 라디오를 켜고’가 담긴 1집 앨범을 발표한 것. 헤비메탈이라는 낮선 장르의 음악을 들고 데뷔한 무명의 신인 밴드의 이 앨범은 30만 장 넘게 판매되며 가요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시나위 1집 앨범에서 보컬을 담당한 이가 바로 임재범이었다. 고교 동창인 신대철과 임재범이 손잡고 한국 최초의 헤비메탈 앨범을 만든 것. 임재범은 시나위 1집 외에도 외인부대 1집, 아시아나 1집에 보컬로 활동했고 명반 ‘록 인 코리아’에도 참여했다. 그렇지만 군 입대로 인해 밴드 활동을 접어야만 했다. 그렇게 임재범이 떠난 자리는 김종서의 몫이 됐다. 김종서는 시나위 2집과 4집에 보컬로 참여했고 서태지가 4집 앨범에서 베이스를 담당했다.
한국 헤비메탈의 ‘큰형’
김태원 김종서 서태지 유현상 이승철 이승환 등은 모두 한국형 헤비메탈 그룹이 배출해낸 스타들이다. 김태원과 이승철은 부활 출신이며 김종서와 서태지는 시나위, 유현상은 백두산, 그리고 이승환은 한국 외국어대학교 메탈 밴드의 리드 보컬 출신이다. 당시 활동했던 시나위의 신대철, 부활의 김태원, 백두산의 김도균 등은 한국 헤비메탈계의 전설적인 3대 기타리스트로 불리고 있다. 이들로 인해 80년대 중반 소위 ‘파고다 시절’이 시작됐다. 종로3가 파고다 극장을 메카로 한국형 헤비메탈 그룹이 붐을 이룬 것. 지금은 실력파로 인정받는 이들이 당시엔 무명 밴드 소속으로 파고다 극장을 누볐다. 이 가운데서도 가장 돋보이는 보컬리스트는 단연 시나위의 임재범이었다. 게다가 임재범은 한국 헤비메탈의 문을 연 장본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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