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이었던 윤아와 로코 연기, 애드리브 참느라 혼나”…연말 첫 각본·연출 ‘반장선거’ 공개 주목하시라!
“처음 감독님을 만나 뵀을 때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크게 나누진 않았어요. 거절하러 갔던 거라서(웃음). 영화 얘기는 거의 안 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데 그러다가 감독님에게 반했던 것 같아요. 나이가 꽤 있으신 어른인데도 이분은 뭔가, 젊으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준경이처럼 꿈을 가지고 계신 분처럼 느껴졌어요. 그래서 실제 나이를 알고 더 놀랐던 것 같아요. ‘나이가 저렇게 많으시다고?’ (웃음)”
‘기적’에서 박정민은 또 한 번 고등학생 역할을 훌륭히(?) 해냈다. 대중들에게 그를 알렸던 영화 ‘파수꾼’을 시작으로 ‘피 끓는 청춘’ ‘전설의 주먹’ ‘시동’과 드라마 ‘사춘기 메들리’ 등 20대 중반의 나이일 때부터 꾸준히 고등학생 캐릭터를 맡아온 ‘10대 맞춤형 배우’인 그다. 그러나 이제 30대 중반을 넘어가기 시작하면서도 자신의 앞에 놓인 고등학생 배역에 고심하는 시간이 길어졌다고 했다. ‘기적’의 출연 제의가 왔을 때 이장훈 감독에게 거절하려 했던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감독님의 선택에 대해 당연히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었죠(웃음). 사실 저는 괜찮아요, 저는 (고등학생 역을) 해도 되긴 한데 보는 사람이 안 괜찮을 것 같아서 고민이 됐어요. 그런데 훌륭한 배우들이 너무 많은데 제게 이런 역할을 주신 데엔 나름의 이유가 있으셨을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턴 나이에 대한 의심을 저도 하지 않기로 했어요(웃음). 그런데 왜 자꾸 이런 역할이 주어질까요? 제가 더러 하다 보니까 위화감이 없다는 생각이 드시나(웃음).”
‘기적’은 경북 봉화에 위치한, 전국에서 가장 작은 간이역 ‘양원역’을 모티브로 한다. 박정민은 이 작품에서 기찻길은 있지만 정작 기차역이 없어 마을 주민들이 목숨을 걸고 선로를 건너 집으로 가야 하는 어려움을 보면서 역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고등학생 준경 역을 맡았다. 역을 만들어 주십사 청와대에 54차례나 되는 기약 없는 편지를 보내고, 단순한 헛된 ‘꿈’으로 여기며 어느 누구도 응원해 주지 않는 이 목표를 위해 열일 제쳐둔 채 뛰는 인물이기도 하다. 완고하게 원칙주의를 고수하는 기관사 아버지 태윤(이성민 분)조차도 준경의 노력을 쓸데없는 일로 치부한다.
우여곡절 끝에 주민들과 힘을 모아 역을 만들게 됐지만 정식 인증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기차가 서지 않는 반쪽짜리 역이 된다. 수학과 물리 영역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지녀 언젠가는 우주를 누비며 별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어린 시절 꿈마저도 접어두고 역에 ‘올인’했던 준경은 크게 낙담한다. 그런 그가 누나인 보경(이수경 분)에게 이제까지 쌓여있던 절망과 울분을 털어내는 신은 이 영화가 단순히 잔잔한 감동만 안겨주는 가족 영화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기도 한다.
“준경이의 대사 중에서 ‘나는 아버지한테 칭찬 받고 싶었다, 용서도 받고 싶었다. 잘했다고 칭찬해 주실 줄 알았는데’라는 말이 굉장히 아팠어요.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고 또 인정받고 싶어 하는 한 소년의 마음이 어쩌면 서른네 살의 박정민의 마음과 닿아있는 것 같았거든요. 공감도 되고, 아픔도 됐기 때문에 그 신을 정말 잘하고 싶었어요. 사실 만족스럽진 않지만 그 당시에 양원역 앞에서 그 대사를 하며 느꼈던 감정이 아직 제 몸 안에 남아있는 것 같아요.”
박정민의 준경은 이성민이 맡은 아버지 태윤과의 사이에 오래도록 묵혀온 응어리를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이 둘 사이의 갈등이 어떻게 풀려 나가는지가 ‘기적’ 속 또 다른 관전 포인트가 되므로 작품 감상 시 눈여겨보면 좋을 것 같다. 특히 ‘기적’에서 처음 이성민과 합을 맞춘 것으로 알려졌던 박정민이 사실 과거에 그와 인연이 있었다는 점을 떠올리며 본다면 그 둘의 호흡이 조금 달리 보일 수 있다.
“어렸을 때부터 엄청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님이었어요. 이렇게 하나의 작품으로 만나는 것 자체가 꿈같은 일이었죠. 사실 선배님은 기억을 못 하실지도 모르는데 제가 선배님 댁을 한 번 가본 적이 있어요. 지방 공연 스태프로 있을 때 일인데, 선배님 방에 들어갔더니 연극, 연기, 영화 관련 책들이 엄청 많은 거예요. ‘이걸 다 보셨다고?’ 충격이었죠. 그만큼 열정적인 분이시고 제가 너무 좋아하는 선배님인데 이번에 함께하면서 들었던 생각은 ‘내가 선배님 나이가 됐을 때 저 정도로 연기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었어요. 배우 한 사람에게서 나오는 깊이라는 것이 나이만 먹는다고 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잖아요. 선배님 연기를 보며 놀라웠던 점이나 제 자신을 돌아보는 순간 이런 게 굉장히 많았던 것 같아요.”
어떤 캐릭터든 몸을 불살라 연기하는 것으로 유명한 이성민과 캐릭터를 세포 단위로 분석해 구축해 내는 박정민이 갈등을 빚는다면 한도 끝도 없이 진지한 이야기를 상상할 사람들이 더러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이야기가 무겁게만 흘러갔던 것은 아니었다. 수학적인 부분에서만 두각을 드러내며 나머지는 영 젬병인 준경의 비범함을 단번에 알아본 자칭 뮤즈 라희(임윤아 분)가 이 영화의 발랄함을 담당한다.
소녀시대의 팬이었다는 박정민은 이번 ‘기적’을 통해 임윤아와 첫 호흡을 맞춘 것을 두고 “너무나 영광스러운 일이었다”며 극찬을 연발해 온 바 있다. 특히 로맨스와 코미디를 넘나드는 임윤아의 코믹 연기에 맞받아칠 애드리브를 참느라 또 다른 고군분투를 해야 했다고.
“사실 코믹한 연기를 받아치는 게 이번 ‘기적’에서 처음 해보는 경험이었거든요. 윤아랑 함께하는 신에서 저는 제 자신에게 계속 ‘가만히 있어!’ 이러고 있었어요(웃음). 상대방이 너무 웃기니까 저도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안에서 막 끓어오르는데 ‘가만있어, 정신 차려!’ 하면서 제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죠. 잘 하지도 못하는 코미디를 상대가 웃기다고 해서 ‘나도 웃겨야지’ 해 버리면 엉망이 될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최대한 자제했고, 윤아랑 맞붙는 장면에서 그런 장면들이 꽤 있었어요. 속으로 ‘하지마 하지마’ 하고 주문 외우는 장면들(웃음).”
데뷔 11년 차를 맞이하면서도 여전히 연기를 배워 가는 입장에 있다고 말한 박정민은 올 연말 왓챠에서 공개되는 ‘언프레임드 프로젝트’를 통해 첫 각본‧연출작인 ‘반장선거’를 선보일 예정이다.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의 오늘-파노라마’ 섹션에 초청된 이 작품을 향한 기대감을 두고 박정민은 “정말요? 누가 기대하고 계시죠?”라며 웃음부터 터뜨렸다.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가 연출의 바다 속에 뛰어든다는 것이 그리 낯선 일이 아님에도 박정민은 어깨가 조금 무겁다.
“‘반장선거’는 제게 있어서 굉장히 뜻 깊은 경험이었어요. 너무 재미있게 찍었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해 보며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죠. 이 영화는 딱 나왔을 때 드리고 싶은 말씀이 너무 많아서 그때 나눌 이야기들이 더 많을 것 같아요. 사실 배우로서도 제게 점수를 주자면 100점인데, 500점 만점이에요(웃음). 아직 배우로서 갈 길이 너무 멀거든요. 그저 한 해, 한 해 점수를 쌓아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어요. 아직 경험해야 할 것, 받아야 할 상처, 그리고 보람도 많아서 그렇게 걸어가다 보면 제가 이 일을 하지 않을 때 즈음에 제대로 된 점수를 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