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유남’은 잊어라! 군인 잡는 군인 변신 호평…“세트장 극사실주의, 내 안의 우울함 돌아봐”
“사실 제 자신이 돋보이고 싶지 않았어요. 작품은 탈영병들의 이야기가 주가 됐어야 했고, 저는 이야기를 끌고 가는 화자의 입장일 뿐이지 돋보이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아무래도 무거운 주제이다 보니 제가 할 수 없었던 부분과 연기들을 한호열(구교환 분)이라는 인물을 통해 잘 표현해주신 게 아닌가 생각했어요. 저와 한호열의 티키타카로 한 번씩 리프레시 할 수 있는 개그 코드 같은 게 있었거든요. 물론 저는 안준호를 연기하면서 촬영 내내 많이 답답했지만요.”
정해인의 인생작으로 꼽힐 ‘D.P.’에서 그는 군대 내 부조리를 겪은 뒤 D.P.(Deserter Pursuit·헌병대 군무이탈체포전담조)에 차출되면서 군대 안의 실태와 밖의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이병 안준호 역을 맡았다. 폭력적인 아버지와 그로 인해 무기력해진 어머니를 혐오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그 두 가지 면모를 약간이나마 모두 닮고 있는 모순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폭력은 바깥에서 찾아낸 자기 안의 불합리와 부조리를 향하고 있다는 것과 학습된 무기력에 순응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감정을 절제하면서 다면적인 모습을 보여줘야 했기 때문일까. 이제껏 어떤 연기도 쉬운 것은 없었지만 ‘D.P.’에서의 안준호는 특별히 더 어려웠다는 게 정해인의 이야기다. 평소에는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지만 그런 만큼 한 번 폭발시킬 때마다 온 힘을 쏟아내야 했다. 그러면서 작품을 접하는 시청자들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또 시청자의 입장에 서서 이야기를 곱씹게 만드는 1인 다역까지 소화해 내야 했다. 배우 생활 8년 만에 처음으로 느끼는 새로운 난관이었다.
“안준호를 표현하는 데 있어서 마음이 무거운 장면들이 많았어요. 연기하기 위해서는 감독님과 많은 이야기를 필요로 했죠. 연기를 마쳤을 땐 ‘내가 정말 이걸 잘 해낸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특히 감정이 휘몰아치는 신을 찍을 때가 힘들었죠. 아마 조현철 배우님(조석봉 일병 역)이 가장 힘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정말 촬영하면서 많이 답답하고, 슬펐고, 화도 났어요. 여러 가지 복합적인 감정이 휘몰아치는데 그게 정말 (연기하기) 쉽지 않더라고요.”
그런 정해인이 정의 내린 안준호는 ‘죄의식을 가진 인물’이다. “남들이 다 그러니까 나도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라는, 어쩌면 ‘D.P.’라는 작품을 관통하는 대사일 수 있는 이 말에 정면으로 부딪치는 그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죄를 묻고 또 답을 얻으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매회 에피소드마다 탈영병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을 바라보며 깨달음을 얻는 성장형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 안준호를 연기할 때 정해인은 자신 안의 우울함을 처음으로 마주하며 실체화시켰다는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안준호가 가지고 있는 모습들은 사실 다 제 안에 있는 모습들이에요. 제 안에 있고, 또 제가 이번 작품을 통해 스스로도 발견한 지점들이죠. 안준호를 연기하면서 정해인이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우울함을 한 번 돌이켜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사람은 누구나 다 우울한 감정을 느낄 수 있고, 힘들 때 그걸 표현하는 방법도 다 다르잖아요. 저는 이번에 안준호를 연기하면서 제가 우울할 때 어떻게 표현하는지를 보여드릴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처럼 배우들이 캐릭터 연구에 딥(Deep)하게 들어갔다고 해서 현장의 분위기도 마냥 어둡거나 무겁게 가라앉았던 것은 아니었다. 현장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정해인은 눈을 반짝이며 장점을 하나씩 꼽아나가기 시작했다. 정해인으로 하여금 ‘이병 안준호’가 아니라 ‘이병 정해인’을 외치게 할 정도로 완벽한 고증을 자랑하는 군부대 촬영 세트장부터, 동료애에 앞선 ‘전우애’를 느꼈다는 출연진들과의 동고동락 이야기, 또 존중과 배려를 지키며 그 중심을 이끌어 온 한준희 감독에 대한 칭찬까지 줄줄이 이어졌다.
시간만 더 주어진다면 끊임없이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했을 정해인은 특히 그와 함께 제일 많은 시간을 붙어있었던 상대역 한호열 상병 역의 구교환 이야기가 나오자 웃음을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앞서 제작발표회 때 구교환의 끊임없는 애드리브에 웃음이 터져 한동안 촬영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는 언급대로, 그를 생각만 해도 웃음이 삐져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교환이 형이랑 저랑 둘 다 낯가림이 심해요. 그런데 그래서 더 친해졌던 것 같아요(웃음). 저도 낯가림이 있는 편인데 친해지기 위해서 교환이 형이 얘기할 때 그게 무슨 얘기든 잘 들으려고 했어요. ‘일단 잘 듣자’, 그 이야기가 사적이든 연기적이든(웃음). 또 애드리브 부분에서는, 사실 저는 애드리브를 많이 할 수 없는 위치거든요. 이등병이 무슨 애드리브를 해요(웃음). 대부분 다 대답만 해야 하는데, (상대가) 무슨 말을 해도 계속 리액션을 하는 식이거든요. 그렇게 모든 액션에 다 리액션을 하니까 형이 너무 좋아하는 거예요. 저는 그렇게 리액션만 해야 했어요, 이등병이라(웃음).”
재입대 악몽을 꾸게 만들 정도로 완벽했던 현장에서 좋은 감독, 좋은 동료들과 함께한 ‘D.P.’로 정해인은 인생작의 역사를 새로 썼다. 앞으로 펼쳐질 시즌2에서 그가 그려낼 일병 안준호의 이야기도 물론 궁금하지만, 올해 그는 12월 방영 예정인 JTBC 드라마 ‘설강화’에 이어 배우 이제훈의 감독 데뷔작인 ‘블루 해피니스’ 촬영도 준비 중이다. 순수함과 부드러움, 다정함으로 정의되던 그동안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조금씩 새로운 색을 찾고 있는 그에게 차기작이 어떤 프리즘의 역할을 해줄지에도 관심이 모인다.
“제가 앞으로 해보지 않았던 것들, 새로운 작품들은 늘 하고 싶어요. 어떤 게 될진 모르겠지만 매번 익숙한 모습일 수도 있고, 새로운 모습일 수도 있는데 아마 작품마다 성격이 달라질 거예요. 제가 ‘D.P.’를 마치고 ‘설강화’ 촬영에 바로 들어갔고, ‘설강화’를 마치자마자 제훈이 형이 감독 데뷔하는 ‘블루 해피니스’에 출연을 결정했거든요. 사실 어느 정도 휴식이 필요한 타임이었는데 대본을 보고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웃음). 제가 글을 볼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공감인데, 보는 분들이 공감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한 것 같아요. 대본에서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기도 했고, 감독님이 저를 생각하면서 대본을 쓰셨다 하는데 실제 대본을 볼 때 너무나 맞춤형 대본이더라고요(웃음). 요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젊은 남녀 청춘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이에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