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만에 빌런 도전, 찐 광기 연기 ‘미쳤다’ 호평…“오윤희 죽인 것 미안, 밤에 유진에 문자 보내”
“아직 여운이 좀 짙게 남아 있어요(웃음). 천서진이 마지막 방송에서 초췌하고 남루한 모습으로 감옥에 있다가 머리카락을 자르는 장면이 있었는데, 저는 늘 천서진의 머리카락에는 상징성이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감독님이 그 장면에 대해서 ‘마치 공작새가 꼬리를 잃은 듯한 기분’이라고 표현해 주셨는데 정말 그 말이 마음에 확 와 닿을 정도였어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 마지막 장면에 여운이 많이 남아서 제가 천서진을 떠나보내는 것에 대해 뭔가 좀 알쏭달쏭한 남다름이 있는 것 같아요.”
9월 10일 시즌3의 마지막 화를 장식했던 김소연은 여전히 천서진을 완전히 떨쳐내기 어렵다며 웃어 보였다. 2009년 ‘아이리스’ 속 김선화를 떠올리게 하는 짧은 머리가 아직 익숙하지 않은 듯 귀 밑으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연신 귀 뒤로 넘기기도 했다. 그의 말대로 천서진의 상징이면서 김소연의 오랜 트레이드마크로 기억에 남았던 긴 머리가 아쉽지 않았냐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살짝 '머리빨'이라서 긴 머리에 애착이 많은데 말이에요”라는 그의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사실 망설여진 것, 맞습니다(웃음). 대본에 천서진이 후두암 설정된 상태로 ‘짧은 머리의 서진, 교도소를 나선다’고 돼 있었어요. 그러고 나서 딸 은별이(최예빈 분)를 멀리서 바라보다가 ‘엄마처럼 살지 마, 미안해, 사랑해’ 하면서 자살하죠. 연기자로서 그렇게 소중한 장면을 찍게 되는데 천서진에게 가발을 씌워서 연기하는 게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천서진이란 캐릭터 덕에 너무 크고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고작 이 머리카락 하나로 무슨 고민을 하고 있냐는 생각도 들었죠. 사실 짧은 머리로 나오는 신은 5분이 채 안 되거든요. 이 5분을 위해 자르는 게 맞는 건가 하는 고민이 많아서 일주일 동안 망설였던 것 같아요.”
그런 그의 마음을 다잡아준 것은 남편인 이상우와 시어머니였다. 한참 고민을 듣던 이상우는 “소연아, 네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너무 멋있다”며 기운을 북돋아 주었고, 시어머니도 머리를 자른다는 그의 결정에 “잘 생각했다”며 어깨를 두드려줬다고. “우리 엄마 아빠는 ‘왜 잘라!’ 그러셨는데…”라며 김소연은 다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너무 고맙게도 상우 오빠가 응원해 줬고, 어머님도 당신의 아들이 배우여서 그런지 그런 면에서 많이 열려 계신 분이었어요. 그렇게 용기를 얻어서 자르겠다고 말씀 드렸는데 감독님도 또 좋은 말씀을 해주시면서 자르는 장면을 촬영해주시겠다고 하셨어요. 사실 저는 이제 다음 일정이 있어서 눈에 안 띄는 가발을 또 준비해야 하는데(웃음), 하지만 후회는 없어요. 머리를 실제로 잘랐기 때문에 그 장면을 찍을 때 제 감정이 잘 올라왔고, 그래서 더 짙은 여운이 남는 것 같거든요.”
배우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았던 천서진은 이제까지의 한국 드라마 역사상 다시없을 악녀이기도 했다. 김소연의 몸을 사리지 않은 열연 덕에 터무니없는 악행에도 리얼리티가 살았다는 호평이 이어졌지만, 그의 악행 자체를 이해하는 시청자는 없었다. 이해심을 바랄 수 없는 캐릭터를 연기한다는 점에서 김소연 역시 많은 속앓이를 해야 했다. 그러나 ‘이브의 모든 것’ 이후 20년 만에 선택한 악역은 그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고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저는 천서진을, 나만큼은 절대 미워하지 말자는 생각을 했어요(웃음). 이 아이의 극악무도한 행동들을 전국민이 질타한다고 해도 정말 나만큼은 ‘천서진은 이게 맞다고 생각하니까 하는 행동이야, 이게 옳아. 천서진은 이거야’라고 생각하고 행동했어요. 모든 미움은 종영 다음날부터 진짜로 미워하자 생각했는데, 윤희(유진 분)를 절벽에서 미는 그 신은 제가 대본을 읽을 때도 숨이 막히더라고요. ‘얘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처음으로 천서진이 너무 미웠어요. 그래서 촬영을 마치고 집에 가서 유진이한테 카톡을 보냈어요. 괜히 ‘유진아~’하고 보냈더니 ‘언니 왜~’ 해서 ‘그냥, 좋은 꿈 꿔’라고 짧게 보냈는데 그러고 났더니 겨우 잠들 수 있더라고요(웃음).”
너무 순한 천성 탓인지 김소연은 천서진을 연기하며 가장 힘들었던 것을 두고 “주변인들에게 너무 못 되게 대한 것”을 꼽았다. 유진을 괴롭힌 날이면 그에게 문자를 보내고 나서야 잠에 들 수 있었던 것처럼 다른 배우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딸 하은별 역의 최예빈에게 각별한 미안함이 있었다고. 천서진이 은별이를 몰아세우는 신을 방송으로 볼 때마다 최예빈에게 닿지 않는 사과를 계속 해야 했다는 게 김소연의 이야기였다.
“은별이한테 하는 잘못된 모성애 연기가 마음 아팠어요. 천서진이 사랑을 못 받아서 주는 법을 몰랐다는 건 합리화인 것 같아요. 사랑을 못 받았어도 줄 줄 아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그런데 왜 천서진은 이렇게까지 삐뚤어진 걸까. 그것도 스스로 생각해도 참 안타까웠고, 연기할 때 은별이한테 너무 미안했어요. 방송 보면서 은별이가 저한테 혼났을 때 머리를 막 때리고 그러면 ‘아 은별아, 어떡해… 미안해, 왜 나 같은 엄마를 만나서’ 하면서 마음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그래서 더 애착도 많이 갔던 것 같아요.”
긴 시간을 천서진으로 살면서 김소연은 많은 것들이 변했다고 했다. 1994년 데뷔 후 30년 가까이 배우 생활을 하며 하나씩 버킷리스트를 채워나가던 그는 오랜 꿈이었던 KBS 주말극을 마친 뒤 ‘현재에 조금 안주하면서 살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을 품게 됐었다고 했다. 어깨가 무거워질 수 있는 역할보다 조금은 가벼우면서 편안하게 연기할 수 있는 인물로서 살아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삶에 욕심이 나던 차였다. 그런 가운데 다가온 ‘펜트하우스’와 천서진은, 김소연의 연기 인생에 또 다른 새로운 터닝 포인트가 됐다.
“제 버킷리스트였던 KBS 주말극 ‘세상에서 제일 예쁜 내 딸’을 무사히 마치고 나니 안주 아닌 안주를 하게 됐던 것 같아요. 그때 마침 남편도 쉬고 있어서 같이 야구를 보며 ‘지금 삶이 너무 재밌다. 이렇게 살면서 배우 생활을 하면 참 행복하고 감사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그런 와중에 저한테 온 이 ‘펜트하우스’가 정말 굉장히 큰 도전이었던 거죠. ‘이브의 모든 것’을 통해 보여준 악역의 모습이 이미 있었기에 내가 다른 모습으로 잘할 수 있을까라는 두려움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고민을 잘 끝냈더니 이렇게 좋은 일들이 많이 생겼네요(웃음). 어떤 일이든지 포기하지 말아야지라는 믿음을 준 작품이에요. ‘아이리스’와 함께 제 연기 인생의 두 변환점 가운데 하나가 될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