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제 측 “최소 50만표 왔다” 믿거나 말거나
▲ 지난 1997년 대선 당시 ‘바둑 공약’을 발표해 화제를 뿌렸던 이인제 의원(오른쪽). 사진은 지난 2010년 열린 국회 기우회 소속 친선바둑대회에서 최병국 기우회장과 대국을 하는 모습.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바둑팬들이 가끔 이런 얘기를 한다. 선거에 나온 사람들이 왜 바둑 공약 같은 것은 내세우지 않느냐는 것이다. 각종 동호인 가운데 이른바 충성도를 따지면 바둑 동호인만 한 사람들이 없다는 것. 그래서 누군가 바둑 공약을 걸면 바둑팬들은 정책이나 이념, 정당이나 사람에 앞서 우선 그걸 보고 찍지 않겠느냐는 것. 우리나라 바둑팬은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언필칭 1000만이라고 했다. 그것까지는 과장이라 하겠지만, 지금도, 적어도 몇 백만은 된다. 몇 백만의 표? 그게 작은가? 물론 농담이다.
선거 역사상 실제 바둑 공약을 내세운 경우가 있었다. 1997년 제15대 대선 때다. 당시 판세는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의 삼파전. 대세론의 이회창 후보와 50년 만의 정권교체의 김대중 후보의 각축이었고, 후발 주자 이인제 후보가 추격하는 양상이었다. 전세 역전의 계기를 모색하던 국민신당 캠프에서 한 가지 아이디어를 냈다. 이인제 후보가 당시 바둑팬들 사이에 인기가 좋았고 팔리기도 많이 팔렸던 바둑전문 주간지 <주간바둑361>에 대선 공약의 하나로 바둑발전을 위한 10대 사업을 발표하는 것이었다. 이인제 후보는 바둑이 짱짱한 아마5단. 프로에게 2~3점으로 버티는 실력이며 국회에서는 손가락에 꼽히는 강자다.
표지에 이인제 후보 얼굴이 나가고 큰 제목이 ‘이인제 바둑공약 발표’였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신문은 매진되었고 <주간바둑361> 편집실에는 전화가 빗발쳤다. 칭찬과 격려, 항의와 반박의 고성이 난무하는 가운데, 바둑361은 곤욕을 치렀다.
바둑팬의 한 사람으로서 너무 반갑다, 그런 걸 실어 준 바둑361이 너무 고맙다, 무조건 이인제 후보를 찍겠다, 그런 지지도 물론 꽤 있었고, 국민신당 지지자들에게는 박수도 받았지만, 그것보다 훨씬, 한나라당과 민주당, 특히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비난과 욕설을 들었다는 것이다.
공평무사해야 할 언론이 어떻게 한 사람만 부각시키느냐, 얼마나 받아 ×먹었느냐, 다 ×× 죽이겠다, 신문사를 확 × 싸질러 버리겠다, 기사 받아 쓴 기자가 어떤 ××냐 등등. 한나라당이 조금은 덜했는데, 그건 그때 한나라당 쪽에서는 이회창 대세론을 굳게 믿고 있었던 탓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전화 받는 기자들이 사과하고 변명하느라 정신이 없었다가 안되겠다 싶어 조금 덜했던 한나라당 쪽보다는, 조금 더 격렬했던 민주당 쪽에 대해 꾀를 냈다고 한다.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는 지지층이 중복되고 있으니 이인제 후보가 좀 뜨는 것이 DJ에게 불리할 게 없다. 이인제 후보가 이회창 후보 표를 좀 가져가야 DJ가 유리할 것 아니냐, 그런 논리 아닌 논리, 재미있는 방패막이를 개발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이인제 후보의 바둑공약은 과연 얼마나 약발이 있었을까. 당시 이인제 후보 참모진과 바둑361 쪽에서는 “적어도 50만 표는 더 얻었다”고 의기양양했었는데, 글쎄 믿거나 말거나. 그러나 바둑공약 이거, 위에서 농담이라고는 했지만, 마냥 웃을 일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바둑에 웬 정치색이냐고 욕을 먹을까. 바둑의 가치를 진정으로 인정한다면 꼭 그렇게 볼 것만도 아니다.
바둑공약을 내걸었다고 해서 무조건 그쪽으로 가는 건 이상하겠지만, 일단 바둑 발전을 위한 구체적 논의의 장을 만드는 효과는 있을 것이다. 바둑이 자랑스러운 우리 문화유산이라면 개인적인 로비를 하면서 바둑을 좀 도와달라고 구차하게 사정하지 말고, 공론의 장에서 누가 이 좋은 것을 먼저 차지하겠느냐, 선착순이다, 그런 식으로 크게 나가야 한다.
그것도 문제는 있겠다. 그러다간 우리 바둑 동호인들도 사분오열될까. 미국 공화당이나 민주당이나 서로 다르면서도 때로 협력하는 그런 것이라면 별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우리는 한쪽이 옳으면 다른 한쪽은 틀린 거니까. 실제로 지금도 딱 그러니까.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