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모그래피의 ‘비트’ ‘친구’ 잇는 누아르 3부작…“내일모레 환갑, 조급함 간절함 있었다”
“‘친구’가 벌써 20년 전 영화인데, 좋은 영화였죠. 거기에 나온 제 이미지가 강하다거나 ‘강릉’ 속 제 캐릭터인 길석과 중첩된다는 부담은 사실 없었어요. 그 이미지는 그것대로 당시 감독님이 쓰신 거고, ‘강릉’에선 또 이것대로 다른 감독님이 다른 이야기를 쓰신 거니까요. 기본적으로 작가가 쓴 이야기와 감독이 연출하는 그 통로에 안착만 되면 새로운 이야기가 창출되기 때문에 저는 전적으로 감독님의 판단에 의지했던 것 같아요.”
유오성은 ‘강릉’을 ‘비트’ ‘친구’를 잇는 그의 필모그래피 속 ‘누아르 3부작’으로 꼽았다.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보는 국산 정통 누아르를 기다려왔던 장르 팬덤의 기대감을 더욱 높여주는 말이었다. 의리를 중시하지만 끝끝내 바라던 믿음은 얻지 못하는 ‘강릉’ 속 유오성이 맡은 길석의 모습은 ‘친구’의 준석을 기억하는 대중들에게 익숙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비슷한 결의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꺼려질 법도 했지만 유오성은 “길석이라는 캐릭터에, 배우로서 처음 욕심을 부렸다”고 말했다.
“원래는 김준배 씨(최무상 역)의 역할로 시나리오를 전달받았는데 이야기를 읽다 보니 길석에게 욕심이 났어요. 배우 입장에서 내가 이걸 자신 있게 잘할 수 있다고 이야기해 본 것도 처음일 정도로 그 역할을 해보고 싶었죠. 제가 그렇게 설득 아닌 설득을 한 것을 감독님이 납득해 주셨기 때문에 마지막에 결정하지 않으셨나 싶어요. 이게 사실 초기에 캐스팅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길석 역이 정해져 있는 때에 제가 치고 들어간 건 아니고요(웃음). 그때 감독님을 설득하면서 ‘내가 잘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신의 첫 번째이자 나의 마지막 누아르 영화일 수도 있을 시나리오다. 그래서 내가 주된 역을 해보고 싶다’고 매달렸죠(웃음).”
길석은 구시대 ‘정통 건달’들의 향수를 간직한 캐릭터다. 의리를 중시하며 간신히 얻은 조직 간의 평화를 깨트리고 싶지 않아 공격보다는 방어를 택한 채 중도를 걸으려는 모습을 보인다. 이제는 조직이 아닌 사업체를 운영하며 고향인 강릉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것은 그의 유일한 꿈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영화에서 길석은 건달보다 사업가에 가까운 모습으로 등장한다. 몸에 딱 맞춘 정장과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게 헤어스프레이로 넘겨 빗은 헤어스타일, 시계와 구두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건달 기를 뺀’ 모습이다.
“길석이는 단순하고 소박한 인물이에요. 자기 선을 지키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겉과 다르지 않게 행동하려고 하죠. 사실 저는 원래 전적으로 현장에 의지하는 편이라서 제가 딱히 캐릭터의 외관에 보탠 것은 없어요. 다 그 분야 전문가들이 알아서 하셨거든요(웃음). 딱 하나 말씀 드린 게 있다면, 길석이의 헤어스타일을 보면 투블럭이잖아요? 감독님 머리가 딱 그 모양이었는데 그게 참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제 눈에. 그래서 그 정도 하나는 ‘나 이렇게 하고 싶다’고 얘기했었어요(웃음).”
강원도를 배경으로 한 강원도 토박이의 영화라는 점에서도 끌렸지만 ‘강릉’은 여러 모로 유오성에게 의미가 남다른 영화라고 했다. 윤영빈 감독에게 길석을 연기하게 해달라고 설득하면서 “이 작품은 당신의 첫 누아르 작품이자 내게는 마지막 누아르 작품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도 어떤 절박함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만큼은,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것이었다.
“비틀거나 화려하게 치장하지 않고, 정말 시나리오가 굉장히 정직하단 생각이 들었어요. 제가 이 영화를 두고 제 마지막 누아르가 될 수도 있겠다고 했던 건 제 나이 때문이기도 했는데요. 제가 지금 쉰여섯 살 먹었는데 실제로 환갑에 가까워지면 누구나 무게를 잡고 ‘에헴’ 하게 되잖아요. 그런 생리적으로 봤을 때 이런 작품은 지금 이때가 아니라면 가지 못할 작품인 거죠.”
그런 ‘강릉’에서 유오성은 장혁과 2015년 KBS 드라마 ‘장사의 신-객주 2015’ 이후 6년 만에 재회했다. 강릉 최대 리조트의 소유권을 놓고 다투게 된 적대 조직의 수장 민석 역을 맡은 장혁은 정통 건달의 모습을 한 길석과는 반대로 사이코패스적인 면모를 보여 차이를 극대화한다. 그 둘이 한 컷에 함께 잡히는 신이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극 전체를 아우르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계속 유지해나가는 것은 배우들의 내공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방증이기도 했다.
“(장)혁이하고 만나는 부분이 초반부 아스라 리조트에서 출입할 때 한 번, 포장마차에서 한 번, 그리고 엔딩에서 한 번 있죠. 이렇게 각자가 많이 부딪치지 않는데도 그들이 저렇게 파국에 치달을 수 있게 됐다는 걸 다른 (부딪치지 않는) 신에서 잘 보여줬던 것 같아요. 그들의 관계가 서로 마주하지 않을 때에도 잘 숙성됐다고 할까요? 그래서 혁이한테도 참 감사해요. 저 역시도 동료 배우들한테 누가 되지 않고 조화롭게 한 것 같아서 또 그것도 감사하고요(웃음).”
유오성은 올해 MBC 금토드라마 ‘검은태양’의 백모사 역으로 먼저 대중들에게 자신의 건재함을 알렸었다. 어둠의 권력을 틀어쥔 지하세계의 1인자이자 깊은 사연을 가진 두 얼굴의 인물로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뒤 다시 그의 특기인 누아르로 돌아온 셈이다. 최근 넷플릭스를 시작으로 해외 OTT들의 활발한 한국 시장 진입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유오성 역시 넓은 무대에서 활약하고 싶은 욕심이 생기진 않을까.
“해외 진출이라니(웃음)! 그건 생각을 못 해봤고,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플랫폼이 많아지니까 배우들에게도 기회가 많아지는 게 아니냐고. 저는 그런 것보단 바꿔 생각해서 ‘정말 좋은 배우들이 많이 나오겠다’고 봐요. 요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처음 보는 배우들이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걸 종종 보거든요. 놀이판이 많아지면서 그분들이 활동을 많이 하시다 보면 좋은 배우들이 많이 나오고 또 눈에 띄겠구나 싶은 거죠. 그렇게 좋은 배우들이 많이 나오면 또 좋은 작품들이 계속 많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있게 될 거고요. 그게 좋은 것 같아요.”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