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벙커샷’ 필요할 때 ‘퍼팅’을 세 번이나
‘일본은 진짜 지진이 나서, 한국은 협회에 지진이 나서 대회가 취소됐다.’ 최근 한 국내 골프업계 관계자가 한 말이다. 일본 프로투어가 동북 대지진으로 4월까지 모든 투어 대회가 취소된 가운데,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KLPGA)는 회장 자리를 놓고 힘겨루기가 벌어져 예정된 개막전이 사라져버렸다. 그럴 만도 한 것이 KLPGA는 3월 말 열흘 사이 회장이 세 번이나 바뀌었다. 하루 이틀 사이에 회장이 바뀌었으니 촌극도 이런 촌극이 없고, 안팎으로 눈총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대목이다. <일요신문>이 세계 3대 투어, 사실상 세계 최강이라는 한국 여자프로골프의 내부로 깊숙이 들어가 봤다.
파문은 지난 3월 22일 선종구 KLPGA 회장(하이마트 회장)이 전격 사퇴하면서 시작됐다. 공식적으로는 ‘일신상의 이유’라고 했지만 지난해 말부터 방송중계권대행사 선정, 한국여자프로골프투어(KLPGT) 대표 선임 등의 문제와 관련해 일부 협회 임원들과 갈등을 빚은 것 때문이었다.
어쨌든 이에 KLPGA는 3월 24일 긴급이사회를 열고 한명현 수석부회장을 회장 직무대행으로 선출했다. 하지만 이 이사회가 정족수 미달로 밝혀졌고, 하루 만인 25일 KLPGA는 2011년 정기총회와 임시 대의원총회를 열고 새 회장으로 구옥희 부회장을 선출했다. 현장에서 일부 보도진 및 관계자가 절차상의 하자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지만 KLPGA는 ‘긴급상황이라 괜찮다’고 무시했다. 심지어 구 신임회장의 인터뷰까지 언론에 배포됐다.
그런데 나흘 만에 임시총회의 정족수(28명)에 한 명이 부족하다는 것이 밝혀져 구옥희 신임회장 선출은 다시 백지화됐다(29일). 이에 김미회 전무이사가 회장대행을 맡았고, KLPGA의 새 회장단은 4월 중 이사회와 임시총회를 통해 ‘제대로’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4월 8일 시즌 개막전으로 열릴 예정이었던 하이마트여자오픈(총상금 5억 원)이 오너(선종구 회장)의 행보와 보조를 맞춰 취소됐다. 그리고 롯데마트여자오픈(4월 14일) 등 다른 투어대회도 TV중계가 결정되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래저래 선수들이 피해를 보고 있고, 또 “24개 대회에 총상금 136억 원(2011년 기준)”이라며 KLPGA가 선언한 ‘르네상스 시대’가 제대로 시작도 하기 전에 만신창이가 되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KLPGA 내부에서는 요즘 일부 사람들을 가리켜 ‘SBS파’라고 표현을 한다. 선종구 회장에 반대했고, 잠시나마 회장단을 구성한 구옥희, 강춘자 프로들을 의미한다. 원재숙, 이영미 프로 등 일본에서 주로 활동한 프로들이 있어 ‘일본파’라고도 하고, 연령으로 보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즉 40세 전후가 많다.
이들이 SBS파로 불리게 된 것은 KLPGA 방송중계권 대행사 선정과 관련이 있다. KLPGA 사무국은 지난해 12월 24일 공개입찰 과정을 거쳐 중계권 대행사로 IB스포츠를 선정했다. 이에 입찰에 참여했던 리앤에스(Lee&S)가 결과에 승복할 수 없다며 발끈했다.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고, 형사고발 조치까지 취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리앤에스가 형사고발을 할 때 피고로 KLPGA의 선종구 회장, 한명현 수석부회장, 김미회 전무, 김일곤 사무국장 등을 명기했다는 사실이다. 집행부 체계 상 중간에 놓여 있는 구옥희, 강춘자 부회장의 이름은 빠졌던 것이다. 즉 구옥희, 강춘자 부회장 등은 리앤에스를 지지했고, 이를 계기로 시쳇말로 ‘SBS파’라는 닉네임이 나온 것이다(KLPGA에 따르면 가처분신청은 기각, 형사고발 건도 1심에서 무혐의 판결이 나왔다).
중계권대행사 선정의 갈등은 3월 KLPGT 공동대표 문제로 이어졌다. KLPGT는 사단법인인 KLPGA가 수익 창출을 목표로 세운 기업이다. 2008년 4월 협회의 재정 자립도를 높이기 위해 출범했으며 KLPGA와는 별도로 마케팅 파트너 계약, 라이선싱 사업, 중계권 사업 등 협회의 수익 사업에 관한 모든 것들을 관장한다. 출범 당시에는 홍석규 전 KLPGA 회장과 한명현 부회장이 공동대표를 맡았는데, 선 전 회장이 KLPGA 회장에 취임하며 단독 대표이사 체제로 바뀌었다. 3월 말로 KLPGT 대표의 임기만료가 다가오면서 일명 SBS파가 공동대표제로의 회귀를 강력히 주장했고, 선 전 회장이 여기에 맞서다 사퇴한 것이다.
하지만 중계권대행사 선정이나, KLPGT 공동대표 문제는 단순히 ‘빌미’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KLPGA의 한 내부 관계자는 “시쳇말로 SBS파로 불리는 회원들은 선 전 회장이 인격적으로 회원들을 무시했다고 생각했다. 반면 다른 쪽은 선 전 회장이 투어의 규모를 늘리는 등 협회 발전을 이끌었다고 봤다. 이런 뿌리 깊은 반목이 중계권대행사 선정이나, KLPGT 공동대표 문제를 이슈로 터졌을 뿐”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선종구 전 회장은 이전 기업인 출신 회장들과는 업무 스타일이 많이 달랐다. 여자프로골프가 지금처럼 인기가 있고, 규모가 커지기 전에 회장을 맡았던 조동만 한솔회장, 홍석규 보광 대표이사 등은 실무는 협회 상근임원에게 맡겼다. 경제적 후원이나 신규 대회 창설 등 큼직한 현안에만 관여했을 뿐 실제로 협회를 관장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2009년 2월 제10대 회장으로 취임한 선 전 회장은 달랐다. ‘하이마트 신화’를 달성한 전형적인 진두지휘형 CEO답게 협회 일을 하나하나 챙겼다. 카리스마도 대단했다. 그 과정에서 협회는 외형을 키웠지만, 일부 회원들의 반발을 산 것이다.
특히 한국여자프로골프의 1세대인 한명현, 강춘자, 구옥희 프로가 선 전 회장을 두고 편가름을 했다. 원래 한명현 프로와 강춘자 프로는 사이가 썩 좋지 않았는데, 선 전 회장으로 인해 전면전으로 발전한 것이다.
KLPGA의 고참 프로인 A 선수는 “KLPGA의 경우 원래부터 한 프로님과 강 프로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두 프로님을 중심으로 따르는 후배들도 갈리는 경향이 있었다. 이것이 이번에 전면에 대두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거는 뚜껑을 열어봐야 아는 법이지만 4월 임시총회에서 새 회장단을 선출할 경우, 현재 구옥희-강춘자를 중심으로 한 SBS파가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새로 선출된 회장의 임기는 선 전 회장의 잔여 임기 1년이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