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가 혐의 영장 없이 증거 취득 무죄’ 대법원 판례…적법 절차 고려 필요, 경찰 수사 관행 바뀔 듯
일선 경찰들 의견은 둘로 나뉘었다. 9월 4일 서울 강북구에서 여성 환자를 몰래 촬영한 의사가 피해자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경찰은 피의자의 휴대전화에서 다른 여성 환자들을 찍은 불법촬영물도 여러 건 찾았다. 이 사건을 맡은 강북경찰서는 추가 범행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압수 영장을 신청했다. 최서환 강북경찰서 여성청소년 과장은 “여죄 수사 시 휴대전화 안의 내용물을 들여다보려면 반드시 영장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8월 20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에서 불법촬영을 하다가 피해자 신고로 붙잡힌 피의자의 휴대전화에서도 추가 범행 증거물이 여러 건 나왔다. 강남경찰서 홍상훈 여성청소년 과장은 “추가 범행은 별건(별도의 범죄)으로 보는데 별건을 수사하려면 원래 영장이 새로 필요하다”며 압수수색 영장을 받았다고 밝혔다. 의정부경찰서 한인옥 여성청소년 과장도 “수사 중에 추가 범행이 드러나면 일단 수사를 중지해야 한다”며 “피의자에게 추가 범행에 대해 임의제출(피의자의 동의를 구하고 증거품을 압수)을 받거나 영장을 신청하는 방식으로 처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압수수색 영장이 필요 없다는 의견도 팽팽했다. 11월 3일 비번인 형사가 서울 양재천에서 여자중학생 2명을 몰래 촬영하던 불법촬영범을 현장에서 붙잡아 화제가 됐다. 피의자의 휴대전화에서는 2016년부터 5년 동안 몰래 찍은 불법 촬영물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현장에서 여죄를 확인하고 피의자를 성폭력처벌법 위반(카메라 등 이용 촬영) 혐의로 입건한 서초경찰서는 피의자 동의를 얻어 임의제출 방식으로 휴대전화를 압수했다. 양종민 서초경찰서 여성청소년 과장은 “같은 수법의 범죄를 수사하는 것이므로 별건으로 보지 않아 압수 영장을 따로 신청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11월 16일 서울 지하철 1호선 천안행 전동차에서도 불법촬영 범죄가 발생했다. 피해자 신고로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피의자 휴대전화에 있는 1만여 장의 사진 가운데 공공장소에서 찍은 것으로 보이는 여성 사진을 다수 발견했다. 이를 수사한 평택경찰서 표정환 여성청소년 과장은 “동일한 범죄의 추가 범행 여부를 조사하는 것은 별건 수사가 아닌 여죄 수사이기 때문에 압수 영장이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비슷한 불법촬영 범죄를 수사한 부산 부산진경찰서도 마찬가지의 판단을 내렸다.
이렇게 일선 경찰들의 해석이 분분한 가운데, 대법원에서 전원합의체 만장일치로 이에 관한 새로운 판례가 나와 눈길을 끈다.
11월 18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임의제출 된 불법촬영 가해자의 휴대전화에서 같은 종류의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도 추가 범죄 혐의에 대해 압수 영장을 신청하지 않았다면 이를 증거 삼아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피고인 A 씨는 2014년 12월 청주시에 있는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만취한 제자를 추행하고 촬영한 혐의로 수사를 받다가 여죄가 적발됐다. 당시 검찰은 피의자의 참석 의사를 확인하지 않고 영장 없이 휴대전화를 포렌식 하다가 동종 범행을 발견했다. 대법원은 ‘피의자나 그 변호인의 참여권을 보장해야’ 하고 ‘임의제출된 정보저장매체에서 압수의 대상이 되는 전자정보의 범위를 넘어서는 전자정보에 대해 수사기관이 영장 없이 압수수색하여 취득한 증거는 위법수집증거에 해당’한다며 A 씨의 동종 범행에 무죄판결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이어 ‘범죄혐의사실과 관련된 전자정보를 적법하게 탐색하는 과정에서 별도의 범죄혐의와 관련된 전자정보(사진·영상 등 불법촬영물)를 우연히 발견한 경우라면, 수사기관은 더 이상의 추가 탐색을 중단하고 법원으로부터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야 한다’고 판시했다. 이어 검찰이 사후에 영장을 발부받고 피고인이 이에 동의했더라도 ‘위법성이 치유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대법원이 이번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수법은 같아도 범행일시와 피해자가 완벽히 동일한 사건은 아니기 때문에 임의제출된 증거물의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고 말했다. 형사법 전문가인 노수환 성균관대 로스쿨 교수 역시 “여죄 역시 별개의 범죄 사실이기 때문에 관련된 증거를 압수하려면 별도로 영장이 필요하다는 게 형사소송법상의 대원칙에 맞다”며 “범죄 혐의 하나를 핑계로 어떤 사람의 휴대전화에 있는 모든 자료를 다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면 사생활 침해의 소지가 크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문제는 판례가 나오기 전에 영장 발부 없이 동종범죄에 대한 수사를 마무리 짓고 재판에 넘긴 경우다. 승재현 연구위원은 “법원에서는 적법절차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전부 무죄가 나올 수도 있는 상황”이라며 “이번 판례는 불법촬영 이슈뿐만 아니라 한국 사회의 수사 관행을 완전히 뒤흔들 수 있는 판례로 앞으로 증거 채증에 있어 수사기관이 적법절차에 대한 고려를 반드시 하지 않으면 증거물을 법정에서 사용하지 못하게 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김정민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