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떨던 솔로들 결혼에 필 꽂혔다
▲ 가족 안부 ‘안절부절’ 대지진이 일어난 3월 11일 도쿄에서 휴대전화 불통 사태가 빚어지며 시민들이 공중전화에 길게 늘어서 가족과 지인의 안부를 확인하고 있다. 로이터/뉴시스 |
지난 6월 초 일본의 한 생명보험 회사가 도쿄 및 인근 수도권 거주 20~60세 성인 남녀 1만 명을 대상으로 지진 후 의식변화에 대해 실태조사를 했다. 약 80%에 해당하는 사람이 “건강하게 살아있단 사실에 감사한다”며 “지진을 계기로 가족이나 친척, 친구 등 가까운 이의 소중함을 깨달았다”고 답했다.
요즘 일본에서는 결혼에 관심을 갖는 독신남녀가 부쩍 늘었다. <일본경제신문>에 따르면, 결혼정보회사에 20~30대 연령층의 회원가입 문의가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이 중에서도 가장 급히 서두르는 타입은 그간 ‘아직 이상형을 만나지 못했다’며 차일피일 결혼을 미뤄왔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지진 당일 대중교통이 마비돼 몇 시간씩 걸어서 귀가를 하거나 대피소로 피난하던 도중에 다른 사람들이 가족을 만나 얼싸안으며 서로 격려하는 모습을 보고는 부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직장 때문에 장거리 연애를 하거나 오랜 기간 연애만 즐겨온 커플도 ‘혹여 연인에게 사고가 났을 때 서류상 가족이 아니면 구조 당국으로부터 연락을 못 받을 수 있다’며 결혼을 결심한다고 한다.
실제 도쿄의 대형백화점 ‘다카시마야’에서는 지진 후 전체 매출이 크게 떨어졌지만, 유독 결혼반지 매장의 매출은 전년 대비 30%나 늘었다. 딱히 결혼 약속을 하지 않은 20대 커플도 ‘소중한 애인과 값비싼 커플링을 나눠 끼고 싶다’며 매장을 찾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지진 후 가족애를 강하게 느끼게 된 남성들이 많다. 가령 경기가 좋던 시절 기업에서 기혼 남성이 지진 피해를 입었을 때 회사가 나서서 집을 마련해주기도 했는데, 이런 풍토가 최근에는 아예 사라졌다는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 기댈 수 있는 곳은 가족이나 친구밖에 없단 사실을 깨닫는다고 한다.
독신여성들은 한결같이 ‘지진 후 갑자기 외로움이 밀려왔다’고 말하고 있다. 여성지 <사이조우먼>에 따르면, 독신녀들은 집은 정전이고 밖은 가로등이 꺼져 아무런 활동도 못하다보니 무력감을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일본의 독신여성들은 구매력이 높아서 뭐든 필요한 건 금방 장만하는 편이다. 그런데 지진 후 필요한 물건이나 음식을 살 수 없는 상황을 경험하자 결국 돈보다 사람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경기침체에다 원전 사고 수습 등이 장기화되면서 경제적 불안감이 커지자 ‘월세도 절약할 겸 결혼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 여성도 있다고 한다. 또 직장 동료 기혼 남성과 비밀리에 불륜을 하던 한 30대 여성은 지진 후 관계를 끝냈다고 한다. 지진 당일 회사에서 근무하던 이 여성은 사내 전체가 패닉 상태에 빠지자 먼저 애인의 안부부터 챙겼는데, 상대 남성은 끝까지 자신을 모른 척했다는 것. 이에 ‘비상시 말조차 건넬 수 없는 사이’란 현실을 돌아보게 됐다고 한다.
가족 간에도 소원해진 사이를 끈끈히 하려는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도시로 나와 혼자 사는 젊은이가 지진 후 부모와 자주 연락하면서 가족애를 더욱 느끼게 됐다는 것이다. 또 부부간에도 여진이 계속 발생하면서 배우자를 영영 못 볼 수도 있단 생각이 들어 부부싸움을 하고도 빨리 화해하려 노력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혼을 생각하는 부부도 늘고 있다. 지진 후로 한동안 연락이 안 돼 발을 동동 굴렀는데 정작 당사자는 태연했을 경우 부부싸움이 크게 벌어졌다고 한다. 또 지진 직후 겨우 컵라면을 하나 구해 아이에게 먹이려 했는데, 남편이 혼자 먹어버리자 화가 난 부인이 이혼을 진지하게 생각한 경우도 있다고 한다.
원전 사고를 계기로 크게 다투거나 이혼을 심각하게 고려하는 것을 일컫는 ‘원전 이혼’이란 신조어도 생겼다. 경제지 <다이아몬드>에 따르면, 어린 아이가 있는 엄마들은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성 물질 노출에 노심초사하는데, 남편이 조금이라도 이런 대화에 무심하면 남편과 싸우게 된다고 한다. 주부들이 수돗물 방사능 오염 등으로 인해 사회문제에 높은 관심을 갖게 됐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또 원전 사고 인접 지역인 일본 동북지방에서는 아이를 데리고 피난을 가려는 며느리와 노부모만 그냥 둘 수 없어 망설이는 남편 사이에 갈등이 빈번해졌다고 한다.
원전 사고의 영향으로 임신을 미루거나 아예 포기하는 부부도 늘고 있다. 어린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방사능에 대한 불안으로 개인용 방사선량 측정기를 앞 다투어 구입하는 모습을 보면서 아이를 안 낳고 결혼생활을 하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각종 의식조사에서 ‘일본의 장래에 두려움을 느낀다’는 응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니시모토 미네 일본 간사이대 심리학 교수는 “지진이나 원전 사고는 굉장한 공포를 안겨주는 사건이기 때문에 갑작스런 의식변화가 있는 것”이라며 “이런 집단적 가치관의 변화는 커다란 스트레스를 주는 외부 사건에 대처하기 위한 일종의 심리적 기제”라 지적하고 있다.
조승미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