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명! BBK·다스 ‘불씨’를 꺼라
▲ 1994년 이동연 회장 자택 앞에서 포즈를 취한 에리카 김(왼쪽에서 두 번째)과 이명박 대통령, 김윤옥 여사. 작은 사진은 권재진 법무장관 후보자(왼쪽)와 한상대 검찰총장 후보자. |
‘권재진 장관-한상대 총장’ 조합은 일찌감치 예견된 인사였다. 청와대는 두 사람을 후보군 리스트 중 가장 위에 올려놓고 검증을 실시했고, 발표 시기만을 조율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청문회를 앞두고 내정자들과 관련된 각종 의혹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 대부분이 청와대가 사전에 인지했던 것들이라고 한다. 논란은 있겠지만 ‘결격사유’는 아니라고 자체적으로 판단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청와대 몇몇 참모들은 반대 견해를 내비치며 이 대통령에게 재검토를 요청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정무라인 한 관계자는 “회전문이나 보은 인사라는 지적은 감수할 수 있지만 청문회에서 한 명이라도 낙마할 경우 그 후폭풍이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라고 털어놨다.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자 이 대통령은 한때 대안 마련을 지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한나라당 지도부 역시 “장관과 검찰총장 중 한 자리만이라도 참신하고 거부감이 덜한 인물을 임명해야 한다”며 이 대통령을 압박했다. 차동민 서울고검장이 한상대 서울지검장의 경쟁자로 대두된 것도 이 무렵이다. 차 고검장의 경우 야권에서도 평판이 좋아 청문회 통과가 용이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대검 중수부의 한 관계자는 “한 지검장이 독주하다 차 고검장이 갑자기 치고 올라온 형국이었다. 차 고검장이 낙점됐다는 말까지 들렸다”면서 “둘 밑으로 줄을 대려는 검사들도 눈에 띄었고, 막판엔 고대(한상대)와 서울대(차동민) 라인 간 묘한 신경전까지 벌어졌다”고 귀띔했다.
고심하던 이 대통령은 결국 원안을 고수했다. 앞서의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정권 말 검찰 수뇌부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충성도”라며 그 배경을 설명했다. 권력 향배에 민감한 검찰을 장악하기 위해서는 최측근을 임명해야 한다는 입장에 이 대통령이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인사가 발표되자 야권은 일제히 비난하고 나섰다. 민주당은 원내대표실에 ‘군사독재 때도 하지 못했던 일’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기도 했다. 김진표 원내대표는 “잘못된 인사를 바로잡기 위해 청문회를 비롯한 모든 법적·정치적 수단을 강구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재 민주당은 ‘박남매’로 불리는 박지원 전 원내대표와 박영선 정책위의장을 중심으로 인사청문회를 준비하고 있다.
반발을 예상했으면서도 이 대통령이 ‘권재진-한상대’ 카드를 접지 않았던 까닭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권력 누수를 최소화하겠다는 이 대통령 의지라는 게 정치권의 우세한 해석이다. 이재광 정치컨설턴트는 “검찰이 여권을 겨누는 ‘임기 말 현상’이 되풀이되는 것을 피하고, 각종 첩보들이 차기 유력 후보에게로 흘러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청문회 통과 가능성이 낮다는 점을 거론하며 권재진 장관 내정을 반대했던 여권의 한 전직 고위 관료는 “야권은 이해가 가지만 한나라당이 이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이 정도도 못하면 식물대통령 아니냐. 권재진과 한상대를 무조건 임명해야 한다고 청와대에 전달했다. 여권 핵심부 상당수가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대통령이 내년 선거 정국을 염두에 두고 권 내정자와 한 내정자를 발탁했을 것이란 관측도 설득력 있게 돌고 있다. 야권은 “법무부 장관에 대통령 참모가 갈 경우 선거 중립성이 훼손된다”며 권 내정자의 임명 철회를 촉구한 바 있다. 이미 정무수석 출신인 맹형규 장관이 선거 주무부처인 행정안전부 장관으로 재직하고 있는 상황에서 법무부마저 청와대 참모가 간다면 공정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야권의 논리다. 공안부를 중심으로 선거사범 수사를 지휘하는 검찰총장에 TK 출신인 한 내정자 임명을 강행한 것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보고 있다. 이에 대해 청와대 측은 “선거는 행정안전부나 선관위에서 맡아 하는 것”이라면서 “내년에 선거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내정을 철회하라는 것은 지나친 정치 공세”라고 반박했다.
이런 가운데 정치권 일각에선 이번 인사를 지난 대선 당시 이 대통령의 아킬레스 건 중 하나였던 BBK 및 다스 관련 의혹과 연관 지어 바라보기도 한다. 최근 이 사건이 다시 점화할 기미를 보이고 있는데, 권 내정자와 한 내정자에게 ‘소방수’ 임무를 맡겼다는 시각이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BBK 의혹 등을 맡아 수사했던 경력도 있다. 권 내정자는 2007년 11월 대검 차장으로 근무하던 시절 이 대통령이 연루된 BBK 사건의 수사발표를 지연시켰다는 의혹을 받은 바 있다. 이 대통령 당선 후 친이계 내에선 권 내정자를 ‘BBK 공신’으로 부르기도 했다. 한 내정자의 경우 올해 2월 귀국한 에리카 김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려 야권 등으로부터 이 대통령에게 ‘면죄부’를 줬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 후 에리카 김은 미국으로 돌아가 사업 재기를 모색하는 등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일요신문>은 지령 994호에서 다스와 에리카 김 남매 사이의 수상한 돈 거래에 대해 보도한 바 있다. 다스가 김경준 씨 등에게 제기한 투자금 반환소송을 취하하기 전 140억 원을 극비로 김 씨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는 에리카 김의 기획 입국설 및 부실수사 공방과 맞물려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미국 연방법원은 문제의 돈이 빠져나간 스위스 은행 계좌에 대해 연방검찰수사를 의뢰해 한국 정가의 시선이 집중됐었다.
그런데 취재 결과, 미국 검찰이 7월 8일에 보고할 예정이었던 수사 결과가 지금까지도 미뤄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현지에서도 그 배경을 놓고 온갖 설이 난무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현지의 한 언론인은 “관련 내용에 대해 미국 검찰에서 확인해주지 않고 있다. 연방법원 지시를 특별한 이유 없이 따르지 않는 사례는 극히 드물다”면서 “한인 사회에서는 이명박 정부 실세들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미국에 다녀갔다는 말들이 흘러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복수의 사정기관 관계자들에 따르면 미 연방검찰은 김경준 씨가 인출했던 스위스 은행 계좌에 대한 입출금 내역 리스트를 작성했는데 여기엔 지금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 이 대통령의 다스 차명 보유 의혹 등을 풀 실마리가 담겨 있다는 전언이다. 리스트가 공개될 경우 이명박 정부가 큰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게 이들 관계자들의 시각. 이 때문에 일각에선 결국 권·한 내정자의 발탁에 다스와 김경준 씨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컨트롤’해주기를 바라는 여권 핵심부의 기대감도 적잖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물론 여권 관계자들은 다스 관련 의혹은 이미 검증된 사안이라고 반박하고 있다. 하지만 의문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현재 민주당은 문제의 스위스 계좌에 관심을 갖고 리스트를 다각도로 추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은 “계좌를 누가 사용했는지 확인하고 있다. 잘하면 에리카 김 남매와 이 대통령 사이에 연결고리는 물론 다스의 실체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