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인 내치고 이준석 주저앉혔지만 ‘재발’ 가능성…안철수와 단일화 ‘굉장한 당근 마련’ 고민
위기는 고통도 주지만 새로운 질서를 창조하는 법. 윤석열 후보는 혼돈 속에서 상왕으로 불리던 김종인 전 중앙선대위 총괄선대위원장의 세력권에서 독립했고, 트러블메이커로 불리던 이준석 대표도 일단은 주저앉혔다. 이제 안철수 국민의힘 후보와의 야권 연대 과제만 남은 셈이다.
#‘상왕의 산’ 넘고
윤석열 후보는 1월 5일 극약 처방을 내렸다. 대선을 불과 63일 앞두고 중앙선거대책위원회를 해산했다. 유력 대선 후보가 선거를 두 달여 앞두고 선대위 주요 직책을 늘리는 방법 등을 통해 체제를 강화한 사례는 있어도 해체한 적은 없었다. 부인 논란, 당내 분란, 본인 말실수 등으로 각종 여론조사에서 속절없이 추락하는 지지율 하락이 빚어지자 ‘극약 처방’을 꺼내 들었다.
기존 선대위 조직을 모두 깨고, 조직·정책·전략·홍보 정도의 핵심 기능만을 가진 초슬림 선거대책본부 체제로 선거를 치르겠다고 그는 선언했다. 이른바 ‘윤핵관(윤석열 측 핵심 관계자)’으로 지목받아온 권성동 사무총장, 윤한홍 전략기획부총장도 당직과 선대위직을 사퇴했다.
정치권을 깜짝 놀라게 만든 뉴스는 따로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 당선을 돕고, 문재인 정부 창출에 밑거름 역할을 하는 등 대통령 만들기 달인으로 불리면서 ‘상왕’으로까지 불렸던 김종인 총괄선대위원장과 윤 후보가 전격 결별한 것이다. 더 쉽게 말하는 이들은 윤 후보가 김 위원장을 선대위에서 내쳤다고 했다.
윤 후보는 김 위원장 해촉을 비롯해 기존 선대위 해체는 ‘초심으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핵심은 김 위원장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윤 후보의 독립선언으로 풀이된다. 선대위 해체 선언 이후 ‘윤석열의 홀로서기’라는 반응이 쏟아졌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사실 김 위원장과의 결합은 윤 후보로서는 애초부터 ‘사랑 없는 결혼’이었다. 권위적인 모습의 김 위원장을 윤 후보는 처음부터 마뜩치 않아했고, 주변의 강권으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는 것이 윤 후보를 잘 아는 이들의 전언이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 정책실장 출신의 김병준 상임선대위원장과 정책 교감을 많이 했던 윤 후보로서는 김병준 위원장과 김종인 위원장의 역할이 겹친다는 점을 생각했고 때문에 김종인 위원장 영입을 썩 반기지 않았다고 한다.
고민 끝에 김종인 위원장에게 총괄역할을 맡기기는 했지만 그의 취임 이후 실적에 대한 의문을 윤 후보로서는 가질 수밖에 없었다. 툭하면 남의 얘기 하듯이 자당 대선 후보를 흉보고 다니는 이준석 대표에 대한 제어 역할을 기대했지만 김 위원장은 이 과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고, 후보에게 도움이 되는 촌철살인의 메시지 발신 능력 역시 김 위원장은 펼쳐내지 못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윤 후보 지지율이 속절없이 떨어지는 와중에 김 위원장은 1월 3일 오전, 마침내 사고를 터뜨렸다. 김 위원장이 느닷없이 윤 후보 측과의 충분한 교감도 하지 않은 채 “선대위 전면 개편을 단행하겠다”고 밝혔고 이에 놀란 윤 후보 측은 발칵 뒤집어졌다. ‘김종인이 쿠데타를 했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았다.
윤 후보는 김 위원장의 발표 소식을 접하자마자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는 전언이다. 이후 일정을 모두 취소하면서 장고를 거듭한 뒤 1월 5일 김 위원장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당사자인 김 위원장과의 사전 논의도 없었던 사실상의 ‘해고 통보’였다. 김 위원장으로서는 굉장한 충격이었지만 윤 후보는 결단을 내렸다. 한 중진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김 위원장이 오버를 많이 했다. ‘김 위원장이 책임지는 선대위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후보는 연기만 하면 된다’는 취지의 말을 김 위원장이 했는데 이 말은 누가 들어도 윤 후보에게는 모욕적 언사였다. 가뜩이나 상왕 논란을 일으키면서 후보를 가린다는 평가가 많았는데 이 말은 정말 결정타였다. 후보로서는 인내 임계점을 넘어선 지점이었다. 향후 김 위원장의 뒤통수 공격이 많이 걱정되고 김 위원장이 만들었던 그림자가 여전히 크다. 그러나 상왕의 벽을 넘어섰다는 것은 후보로서는 새로운 기회다.”
#‘준석의 강’ 건너
1월 5일 김종인 위원장과 헤어지면서 ‘상왕 산맥’을 넘어섰다는 평가를 일단 받아낸 윤 후보는 1월 6일부터 새출발을 희망했다. 그러나 정치판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1월 6일은 이준석 대표와의 정면 대결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론은 이날 아침부터 ‘김종인과 결별한 윤석열, 이준석과도 끝?’이란 요지의 기사를 출고하기 시작했다. 윤 후보는 이 대표가 출제한 ‘연습문제’를 푸는 차원에서 서울 여의도 지하철역 출근길 인사에 나섰으나 이 대표가 이에 대해 “관심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 결별설은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언론의 예상은 들어맞았다. 이내 불꽃 튀는 충돌이 시작됐다. 윤 후보가 신임 사무총장과 부총장 임명안을 들고 간 비공개 최고위에서 이 대표가 “내 도장 찍힌 임명장은 줄 수 없다”고 버티면서 양측은 서로 언성까지 높였다.
점입가경이었다. 국민의힘 의원들은 의원총회에서 사상 초유의 당 대표 사퇴 결의를 추진하고 나섰다. 의총 분위기는 살벌했다. 박수영 의원은 의총 자리에 없는 이 대표를 향해 “사이코패스·양아치”라는 금기어까지 사정없이 던지는 등 험악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의원들이 의총을 소집, 이 대표에게 강력한 압박을 가한 것은 여론의 든든한 힘이 뒤에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의원들에게는 대구경북(TK)을 비롯해 국민의힘 핵심 지지층이 이 대표에게서 완전히 돌아섰다는 여론 동향이 속속 올라왔다.
당 대표가 사퇴해야 한다는 깃발을 이날 의총에서 처음 들고 나온 이도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의원 지역구였던 대구 달성의 추경호 원내수석부대표였다. ‘평소 점잖기로 소문난 추 의원이 오죽 답답했으면 이랬을까’라는 말이 나올 만큼 이 대표에 대한 감정의 골은 의원들 사이에 깊었다.
의원들은 이날 오후 늦게 ‘이 대표의 언행에 심각한 일탈이 있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절대다수 의원은 이 대표가 즉각 사퇴해야 한다고 촉구한다’는 2개 항으로 구성된 사퇴 결의 초안을 완성해뒀던 것으로 전해졌다. 재신임을 받은 김기현 원내대표는 이 초안을 들고 이 대표를 강하게 압박했고 의총 참석을 거부하기도 했던 이 대표의 의총 참석을 마침내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결국 이 대표는 이날 저녁 늦게까지 정회를 거듭하며 잇따라 열린 의총에서 “세 번째 도망가면 대표직에서 사퇴하겠다”고까지 밝히면서 자세를 한껏 낮췄다. 이 대표가 의원들의 압박에 백기를 든 셈이다.
국회의사당 길 건너 당사에 머무르면서 의총장 기류를 시시각각 보고받던 윤 후보는 이 대표가 달라진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보고가 날아들자 국회로 직행했다. 윤 후보와 이 대표는 의총장에서 의원들의 기립 박수와 환호 속에 포옹했고, 이 대표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함께 평택 순직 소방관 조문을 가면서 당 내분은 ‘비극’이 아닌 ‘희극’으로 막을 내렸다. 이날 의총에 참석했던 한 초선 의원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갈등이 봉합된 것은 정말 다행이다. 하지만 이날 의총 현장만 봐서는 화해로 끝난 이날 최종 결과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 대표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윤 후보와 이 대표의 갈등 해소 국면은 정치적 위기감을 느낀 이 대표와 지지율 하락에 비상등이 켜진 윤 후보의 고육지책이란 측면이 크다. 두 사람 관계는 여전히 불안하고 무엇보다 이 대표의 성격이 워낙 자기중심적이어서 언제든 다툼의 재발이 가능하다.”
실제로 이 대표는 갈등 봉합 바로 다음 날인 1월 7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연, 전날 의총장에서 자신을 사이코패스라고 비판한 박수영 의원을 향해 “박 의원이 의원을 대표하는 어떤 위치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적당히 하시라. 저라고 할 말 없어서 안 하는 게 아니고, 적당히 하시고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다”고 또다시 날을 세웠다.
#‘철수의 바다’까지 횡단?
당 내홍 등으로 윤 후보 지지세가 추락하는 사이에 안철수 국민의당 대선 후보가 파죽지세의 여론조사 지지율 상승세를 나타냈다. 한국갤럽이 1월 4∼6일 전국 18세 이상 1002명을 대상으로 대선 후보 지지도를 조사(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한 결과, 이 후보는 36%, 윤 후보는 26%의 지지율을 보였다.
이 후보가 윤 후보를 오차범위 밖에서 앞섰다는 것보다 더 관심을 모았던 수치가 있다. 바로 안 후보 지지율이었다. 안 후보는 15%를 기록하며 3주 전인 12월 17일 발표한 조사와 비교해 지지율이 10%포인트 올랐다. 이번 대선 국면에서 안 후보가 얻은 지지율 최고치다.
선거법상 15% 이상 득표율을 기록하는 후보는 선거비용 전액을 보전받는다. 이 때문에 ‘지지율 15%’는 후보가 독자적으로 완주할 가능성을 점치는 중요한 잣대이자 여차하면 1등 후보까지도 넘볼 수 있는 ‘마의 지지율’로 불린다.
한국갤럽의 3주 전 조사와 비교해 윤 후보 지지율은 9%포인트 하락했다. 국민의힘이 혼란상을 노출하는 가운데 윤 후보의 지지율이 안 후보 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세대별로는 18∼29세에서 이 후보(24%), 안 후보(23%), 윤 후보(10%) 순이었다. 2030세대의 지지세가 일정부분 안 후보 강세에 도움이 된 것으로 관측된다.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안 후보와의 단일화는 필요조건이 아니라 이제 필요충분조건으로 본다. 안 후보와의 단일화 없이는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정당일체감이 강한 핵심 지지층이 많은 국민의힘 윤 후보가 당세가 약한 국민의당 안 후보보다 우위에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단일화를 위해 제시할 패자 보상책 마련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DJP 연합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확실한 보상책을 김종필 전 총재에게 줬다. 거의 공동정권 수준이었다. 정치판에서 이미 원로 정치인 반열에 오른 안 후보는 굉장한 보상책을 요구할 것이다. 이 문제의 해결이 매우 난해한 방정식이 될 것인데 윤 후보 협상력이 관건이 될 것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의 이른바 DJP 연합을 목격하면서 당시 이회창 후보의 패퇴를 지켜봐야 했다는 국민의힘 전직 의원은 후보 단일화가 태평양 바다를 건너는 대항해가 될 만큼 어려울 것이라고 내다봤다.
최경철 매일신문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