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담’으로 ‘소통의 장’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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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과 유럽 젊은이들이 함께 어울려 바둑을 두는 모습. 작은 사진은 이강욱 8단이 베트남어로 직접 써서 만든 정석책. | ||
반가운 소식이다. 한국기원은 그동안 바둑팬들로부터 칭찬보다는 비난을 조금 더 많이 들어왔던 게 사실인데, 올해 양재호 9단이 새 사무총장이 된 후에는 한국기원이 잘한다는 소리가 자주 들린다. 신임 양재호 사무총장은 운이 좋다는 말도 들린다. “바둑팬들의 시선이 예전에는 한국기원 한 곳에만 몰렸던 것에 비해 요즘은 한국기원과 대바협, 두 군데로 분산된 덕도 있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다. 자의반 타의반, 대바협이 일정 부분 한국기원의 방패막이 역할을 해 주는 경우도 적잖으니까. 역시 바둑도 인생도 운칠기삼(運七棋三), 그게 맞는 말 같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12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외국인이 2.5%가 넘으면 다문화국가라고 한다는데, 우리도 이제 2.3%인가, 2.4%인가 그 언저리에 이르렀고 그에 따라 다문화가정도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고 한다. 현재 우리나라 사람과 가정을 이루어 국내 거주하는 외국인은 약 15만 명, 그 가정의 자녀가 6만, 그리고 매년 3만 5000명 정도의 외국인이 우리나라 사람과 결혼하는 추세라고 한다. 한국기원의 다문화가정 바둑보급 시작은 시기를 놓치지 않은 일이다. 한국기원의 의욕에 찬 행보, 타임리한 행동에 지지의 박수를 보낸다.
다문화가정에 바둑을 보급하는 것은 바둑의 본령이랄까, 본질적 특성-장점에도 잘 어울리는 일이다. 바둑은 여러 가지 요소를 함축하고 다양한 덕목이 있는데, 이른바 ‘법고창신(法古創新)’과 ‘사해동락(四海同樂)’은 바둑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슬로건이다. 법고창신은 온고지신과 비슷한 말이고, 사해동락은 글자 그대로 인류 모두가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함께 즐긴다는 것. 다문화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선진의 척도라고 한다. 바둑은 다문화에 대한 이해와 배려의 물꼬를 트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 일에 바둑만 한 것이 없고, 바둑처럼 쉬운 것이 없다.
교재는 일단 영어 중국어 일본어 러시아어 베트남어 몽골어 등 6개국 버전. 욕심 같으면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 둘 정도는 더 포함시키고 싶고, 베트남이나 몽골, 필리핀, 인도네시아, 이쪽을 더 치중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중국,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러시아만 해도 이미 바둑이 상당히 보급되어 있어 자국어 입문 교재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이고, 국내 다문화가정 중에는 필리핀계도 많다고 하니까 말이다.
유럽 쪽을 뒤로 미룬 것도 온당한 처사. 유럽은 유럽바둑연맹(EGF)이 오래 전부터 입문 보급 일을 해 오고 있다. 입문서를 유럽 모든 나라의 말로 만들어 놓은 것은 대단한 일이다. 불가리아나 유고슬라비아 같은, 아직 바둑이 상대적으로 덜 보급되어 있는 나라들의 말로 된 것도 물론 있다. 참고가 될 만하다.
이왕에 새로이 ‘글로벌 바둑 입문서’를 여러 나라 말로 만든다고 하니 이 기회에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외국어로 번역-번안하기 전에 우선 우리 바둑 용어를 한번 점검-수정-보완했으면 하는 것이 몇 개 있다. 대표적인 것이 ‘때린다’, ‘죽다’, ‘숨통’ 같은 용어다.
TV에서 해설하는 프로기사도, 프로기사 옆에서 진행을 돕는 아마추어도 “두 점을 때리면…” “패를 때려야…” 이렇게 말한다. 간혹 ‘따내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때리다’와 ‘따내다’, ‘따내다’로 했으면 좋겠다.
바둑교실 원장님같이 입문을 지도하는 분 중에는, 대부분이 “바둑돌은 숨통이 네 군데 있어요. 네 군데가 다 막히면 죽는 거예요.” 이렇게 설명한다. 바둑과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숨통이 막히면 죽는다,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을 때면, 실감은 나지만 섬뜩하다. 바둑은 전쟁놀이의 일종이다. 그러나 바둑을 세계에 보급하고, 다문화가정에 바둑을 보급하려면 용어의 순화가 시급하다.
바둑의 보급과 세계화가 화제에 오를 때면 누구나 언필칭 바둑 올림픽이지만, 바둑 올림픽이란 것은, 사실은 요원한 일, 험난한 길이다. 올림픽을 위한 룰과 용어를 정할 때 중국과 일본이 양보할 까닭이 없다. 일본은 바둑 세계보급의 선구자임을 내세울 것이고, 중국은 현재 세계 각국, 동남아는 물론이고 유럽, 미주까지 포함해 곳곳에 바둑 실력자가 나가 있거나 현지에 살고 있는 화교들이 그곳 바둑계를 틀어쥐고 있는 상황이니 더욱 그렇다. 표 대결로 하자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또 인천 아시안게임에도 바둑이 빠져 있다. 인천 아시안게임에는 바둑이 꼭,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들은 높건만 아직 그를 위해 어느 곳에선가, 한국기원이든 대바협이든 구체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얘기는 없다.
그래서 이번에 발표한 다문화가정 바둑보급에 기대하는 바가 각별하다. 단기간의 성과에 좌우되지 말고 장기적인 사업으로 밀고 가기를 바란다. 이게 알맹이 있는 보급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게 내용 있는 세계 보급이고 바둑 올림픽으로 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인도 쪽의 서남아시아나 중동, 아프리카 쪽에도 보다 구체적으로 관심을 가질 때가 되었다는 것을 환기했으면 한다. 일차적으로는 우리 바둑의 외연 확장을 위해서, 현실적으로는 언젠가 벌어질 수 있는 올림픽의 표 대결을 위해서. 그쪽은 역사적으로 수리에 밝고 앞섰던 문명이니 바둑과는 의외로 쉽게 친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인도는 바둑의 발상과도 연관이 된다. 심지어 바둑TV의 초대 국장을 지냈고, 이후 바둑의 발상에 관해 그 나름대로, 독자적으로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해 온 박영규 씨(58) 같은 재야 바둑연구가 겸 사학자는 벌써 10여 년 전에 바둑과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는 수메르 문명과의 관련을 규명하는 글을 발표한 적도 있다. 그런 분들의 글을 소개할 기회가 생기기를 바란다.
바둑 다문화가정 보급 시작과 함께 바둑이 중국에서 생겼다는 통설 아닌 통설, 속설 아닌 속설도 수정되기를 바란다. 다문화가정 바둑 보급이 만에 하나 즉흥적인 아이디어의 소산이었을지라도, 그건 절대 아니겠지만, 함의가 크다. 한국 바둑계의 새로운 광맥이 될 수 있다는 느낌이다.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