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받던 공주… 직접 차릴 수 있을까
▲ 박근혜 전 대표가 지난 8월 15일 고 육영수 여사 37주기 추도식에 참석해 고인을 추모하는 시간을 가졌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하지만 안풍(안철수 바람)의 충격은 컸다. 안철수 신드롬이 거품이 아니라 실체가 없던 박근혜 대세론이 거품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일요신문>은 박근혜 대세론을 굳건하게 받치고 있는 박 전 대표의 화려했던 과거 이력들을 되짚어 보고자 한다. 박근혜 대세론은 과연 어떤 변수에도 흔들리지 않는 대선구도의 완벽한 방어막이 될 수 있을까. 박근혜 대세론을 떠받치는 주요 축인 박 전 대표의 국모 리더십 실체를 따져보았다.
박근혜 전 대표는 1974년 8월 15일, 육영수 여사의 갑작스런 서거 이후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자리에 오르게 된다. 당시 박 전 대표는 대학 졸업 후 프랑스에서 유학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스물두 살에 갑작스럽게 ‘국모’의 빈자리를 대신하게 된 박근혜 전 대표는 육영수 여사의 일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된다. 국민의 민원을 받아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조언하는 일을 도맡아 했던 육영수 여사는 ‘청와대 내 야당’ ‘청와대 안의 신문고’라고 불린 바 있다.
박 전 대표는 “청와대에 들어온 수백 건의 민원을 점검하고 담당 부서에서 일을 잘 처리하고 있는지 일일이 확인해야만 마음이 놓였다.…입술이 부르트고 항상 미열을 안고 살았다. 아파도 아파할 시간이 없었다”고 당시 생활에 대해 밝힌 바 있다.
‘퍼스트레이디’로서 겪었던 이 시기의 국정 경험 능력은 박 전 대표가 정치를 시작한 이후 대권주자로 발돋움하기까지, 정치적으로 활용해 왔던 부분이기도 하다. 박 전 대표는 자신의 퍼스트레이디 경험을 공개적으로 밝히진 않았지만 누구나 대선주자로서의 주된 강점으로 생각해 왔다. 또한 당시 쌓았던 외국 정상들과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점은 분명 ‘국가지도자’를 꿈꾸는 이로서 유리한 면일 것이다.
그러나 일각에선 박근혜 전 대표의 ‘퍼스트레이디’ 시절의 리더십과 경험이 너무 과대포장된 것 아니냐는 의견을 제기하기도 한다. 매스컴을 통해서는 긍정적인 부분이 주로 부각돼 전해졌으나, 되새겨 봐야 할 대목도 있다는 지적을 하는 사람도 있다.
한 정치평론가는 “당시엔 대통령의 권력이 현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것이었다. 박 전 대표가 지금까지 ‘공주’라고 불리는 데에는 ‘대통령의 딸’로 자라온 성장환경뿐 아니라 어린 나이에 ‘퍼스트레이디’를 경험하며 누구에게나 주목받은 삶을 살아왔던 데에도 일정 부분 그 이유가 있다”고 평하기도 했다. 어린 시절의 박 전 대표는 “흠 잡기 어려울 만큼 바르고 어른스런 아이”라는 평을 들을 만큼 조숙했지만, 자신을 ‘떠받들어 주는’ 주변 사람들의 존재를 항상 ‘자연스럽게’ 여기며 살아오기도 했다. 그래서 현재에도 박 전 대표 주변 일부 인사들은 “(박 전 대표가) 대접받는 데 매우 익숙한 것 같다. 이젠 ‘공주’가 아닌 ‘여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박 전 대표의 지지조직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한 인사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주기도 했다. “어느 행사장에서 박근혜 전 대표를 만났는데, 모임의 회장과 함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갔다. 내 앞으로 걸어가던 회장이 박 전 대표에게 다가가면서 갑자기 그 앞에서 무릎을 꿇으며 큰절을 하더라. 뒤에 있던 나는 순간 놀라고 당황해서 같이 큰절을 해야 하나 망설여졌다.”
이 인사는 “박 전 대표에 대한 충성심은 알겠지만 이 회장도 나이가 드신 분이었는데 큰절까지 하는 건 좀 아니다 싶었다. 그런데 박 전 대표가 큰절을 자연스럽게 받는 느낌이어서 좀 놀랐었다”고 덧붙였다.
한 매체의 기자는 “박근혜 전 대표는 엄밀히 말해서 ‘퍼스트레이디’가 아니라 급서한 어머니의 역할을 계승한 자식이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하다. 설령 박근혜가 ‘퍼스트레이디’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강점이 될 수는 없다고 보는 시각도 온존한다. 육영수 여사가 서거한 1974년 이후는 유신시대였다. 이 시대의 정치는 결코 정상적인 것이 아니었다. 유신 통치는 민주주의의 천적인 ‘파쇼정치’였다. 이런 환경의 정치 체험을 일방적으로 ‘정치 수업’이라고 규정하기는 어렵다고 본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런데 어린 시절의 박 전 대표는 중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수석 입학할 정도로 공부도 잘하고, 리더십도 뛰어난 모범생이었다고 한다. 한번은 박 전 대표가 반장을 뽑는 투표에서 반 학생수 32표 중에 30표를 얻은 적이 있었다고 한다. 나머지 두 표 중 한 표는 결석한 학생의 자동 기권표였고, 나머지 한 표는 박 전 대표가 다른 학생에게 투표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무렵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5대 대선에서 윤보선 후보에게 거의 패할 뻔하다가 15만 표 차이로 간신히 이겼다. 당시 어렸던 아들 박지만은 “누나는 싹쓸이로 당선했는데 아버지는 턱걸이를 하셨어요”라고 말해 식구들이 한바탕 웃었다고 한다(<박정희 일화에서 신화까지>(서림문화사)).
▲ 박정희 전 대통령은 아내 역할을 대신한 박 전 대표에게 크게 의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무뚝뚝하고 깊은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사람이 나중에 보니 더 의리가 있고 인정이 많은 사람이었음을, 학식이 많고 똑똑하여 많은 기대를 걸었던 사람이 나중에 보니 자기중심조차 제대로 잡을 수 없고 아부를 일삼는 사람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 인간사의 한 단편이다.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보니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사이다.”
박근혜 전 대표가 일부 측근들 외에는 사람을 가까이 하지 않아 종종 ‘용인술’에 대한 논란을 부르고 있는 것도 이와 같은 근원 깊은 사람에 대한 배신감에서 출발하는지 모른다. 한나라당 전략가로 활동했던 윤여준 전 장관 역시 박 전 대표에게 “가까이 오려는 사람을 받아들이라”고 충고했었지만 박 전 대표는 이러한 주변의 말에 요지부동이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일부 인사들은 “박 전 대표가 부모를 모두 잃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쌓은 그만의 성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박 전 대표의 ‘국모 리더십’이 단순한 허상에 불과한 것 아니냐는 지적을 하는 이들도 있다. 한 정치평론가는 “육영수 여사는 나환자들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줬던 일화처럼 모든 이들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국모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육 여사의 행동방식을 따라하며 퍼스트레이디 시절 만들어둔 ‘국모 리더십’이 박 전 대표의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도 큰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박 전 대표가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후 주변 사람들을 기용하고 다루는 모습에는 포용의 느낌보다는 매우 큰 ‘장벽’이 느껴진다”고 평하기도 했다.
조성아 기자 lilychic@ilyo.co.kr
박근혜 예지력 얽힌 일화
그날, TV 속 아버지 얼굴이…
박근혜 전 대표는 ‘10·26 사태’가 벌어진 당일 이상한 조짐을 느꼈다고 한다.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위즈덤 하우스)에서 박 전 대표는 그날의 기억에 대해 회고한 바 있다.
1979년 10월 26일 이른 아침,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오늘은 삽교천 행사에 간다” 하고 인사를 건네며 청와대를 떠났다고 한다. 박 전 대표는 그날도 청와대에서 손님을 맞으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손님접견 때문에 돌아온 아버지에게 인사를 못하고, 박 전 대통령 역시 저녁 약속이 있어 궁정동으로 떠나면서 두 사람은 아침에 본 이후로 만나지 못했다고.
박 전 대표는 “그날 저녁 텔레비전에서 삽교천 준공식 장면을 보았다.…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아버지의 얼굴이 유난이 하얗게 보였다. 흑백텔레비전으로 시청하는 건데도 아버지는 안색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이상하게도 이 세상 분이 아닌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의 건강이 무리가 온 것 같으니 좀 더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함께 따라갔던 비서에게서 평소와 다르게 심상치 않은 일이 몇 가지 일어났다는 얘기를 후에 들었다는 것. 제막식 때 기념탑 커튼이 잘 걷히지 않았고, 노루 한 마리가 박 전 대통령이 탑승한 헬리콥터 소리에 놀라 뛰다가 그만 나무에 부딪혀 죽었다는 것 등이었다. 그 뒤 다음날 일정이 빡빡해서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는 박 전 대표는 새벽 1시 반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깨 “일어나 몸차림을 해 주십시오”라는 비서관의 말을 듣게 된다. 박 전 대표는 “순간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어머니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고 당시의 기억을 밝힌 바 있다. [조]
그날, TV 속 아버지 얼굴이…
박근혜 전 대표는 ‘10·26 사태’가 벌어진 당일 이상한 조짐을 느꼈다고 한다. 자서전 <절망은 나를 단련시키고 희망은 나를 움직인다>(위즈덤 하우스)에서 박 전 대표는 그날의 기억에 대해 회고한 바 있다.
1979년 10월 26일 이른 아침,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오늘은 삽교천 행사에 간다” 하고 인사를 건네며 청와대를 떠났다고 한다. 박 전 대표는 그날도 청와대에서 손님을 맞으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고 한다. 손님접견 때문에 돌아온 아버지에게 인사를 못하고, 박 전 대통령 역시 저녁 약속이 있어 궁정동으로 떠나면서 두 사람은 아침에 본 이후로 만나지 못했다고.
박 전 대표는 “그날 저녁 텔레비전에서 삽교천 준공식 장면을 보았다.…이상하게도 그날따라 아버지의 얼굴이 유난이 하얗게 보였다. 흑백텔레비전으로 시청하는 건데도 아버지는 안색이 유난히 하얗게 보였다. 이상하게도 이 세상 분이 아닌 것같이 느껴졌다. 나는 아버지의 건강이 무리가 온 것 같으니 좀 더 신경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함께 따라갔던 비서에게서 평소와 다르게 심상치 않은 일이 몇 가지 일어났다는 얘기를 후에 들었다는 것. 제막식 때 기념탑 커튼이 잘 걷히지 않았고, 노루 한 마리가 박 전 대통령이 탑승한 헬리콥터 소리에 놀라 뛰다가 그만 나무에 부딪혀 죽었다는 것 등이었다. 그 뒤 다음날 일정이 빡빡해서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는 박 전 대표는 새벽 1시 반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깨 “일어나 몸차림을 해 주십시오”라는 비서관의 말을 듣게 된다. 박 전 대표는 “순간 등 뒤로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번개처럼 어머니의 일이 스쳐 지나갔다”고 당시의 기억을 밝힌 바 있다.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