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이고 씹혀도 덤덤 ‘갑갑하다 갑갑해’
▲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적지 않은 젊은 직장인들은 장기근속 직원을 부러움보다는 씁쓸한 눈으로 보고 있다. 좋아서 오래 다닌 게 아니기 때문이다. 금융업계의 L 씨(31)의 눈에도 마찬가지다. 같은 팀에 15년간 근무한 과장이 있지만 한 번도 부럽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다.
“40대 중반이 다 돼 가는데 만년 과장이에요. 주변에선 그것도 능력이라고 하는데 제가 볼 땐 갑갑합니다. 4번이나 승진에서 미끄러졌어요. 속된 말로 까이는 걸 알면서도 그냥 다니는 거예요. 나름 능력을 인정받겠다고 부하직원들을 볶을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면 짜증도 나지만 씁쓸한 생각도 들죠. 퇴근도 안하고 늦게까지 남아서 스포츠 경기를 보고 있을 때도 많고 집에 가려는 직원들 붙잡고 저녁 먹자고 하는 일도 부지기수예요. 오래 근무한 ‘고수’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다닌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전자제품 회사에 근무하는 M 씨(여·27)도 L 씨의 경우와 같은 상사가 있다고 이야기했다. 15년 가까운 시간을 한 회사에서 근무하는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안 돼 보일 때가 더 많단다.
“항상 어깨가 축 처져서 다니는 상사예요. 회사가 절대 좋아서 오래 다니는 건 아니고, 40대 중반이 가까워서 이직의 위험을 감수하느니 그냥 있자는 생각인 것 같아요. 일 처리 능력은 나쁘지 않아서 회사에서도 어느 정도 능력을 인정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항상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처럼 의욕이 없고 가족 때문에 마지못해 다닌다는 말도 여러 번 들었어요. 그분을 볼 때 원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한 회사에 오래 다니는 것보다는 하고 싶은 일을 신나서 할 수 있는 곳을 찾아가는 게 훨씬 나은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씁쓸함을 넘어서 안쓰러운 마음까지 드는 경우도 있다. 일종의 ‘버티기’일 때 드는 마음이다. 때론 불안한 하루하루를 그 오랜 시간 견뎌냈다는 것이 대단해 보인다. J 씨(여·29)가 다니는 의료 관련 회사에서 20년 넘게 근무한 직원 이야기다.
“그분 일이 진짜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듭니다. 그런데도 20년을 버텼다는 게 일단 대단하고 가끔은 안쓰러운 경우를 보기도 해요. 나이는 훨씬 어리지만 상사급인 직원들이 시키는 허드렛일도 꾹 참고 해야 하거든요. 어떻게 그런 환경에서 그토록 오래 일할 수 있을까, 참 독한 것 같다는 생각과 동시에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겁니다. 다른 학력 좋은 직원들은 오래 근무하면 그만큼 승진과 동시에 명예욕도 채울 수 있고 이래저래 혜택이 많죠. 그래서 얻는 게 많으니까 버틸 만하다 하지만 그분은 아무리 긴 시간을 일해도 그만큼의 보상이 주어지질 않아요. 저라면 같은 상황에서 절대 그렇게 오래 버틸 수 없을 것 같아요.”
외식업체에 근무하는 D 씨(33)의 상사도 오랜 기간 버티기로 일관하는 직원 중 하나다. 40대 후반에 그리 뛰어난 능력을 가진 것도 아니다. 오로지 ‘예스맨’ 역할만 하는 상사를 보면서 D 씨는 상사처럼 해서라도 오래 일하는 것이 옳은 건지 회의가 든단다.
“상사한테 고충을 토로하면 과감하게 진행하라고 그래요. 뒤처리는 자기가 하겠다고 큰소리를 탕탕 치죠. 그러다 사장실에 보고하러 갔을 때 사장이 부정적인 의사를 조금이라도 내비치면 당장 스톱이에요. 사장님 말에는 무조건 예스입니다. 이런 식으로 그 오랜 세월을 견딘 건가 싶더라고요. 사장이 그 분한테 직급에 어울리지도 않는 개인적인 심부름을 시키는데도 매번 ‘충성모드’로 돌입해 정작 자기 업무는 뒷전인 때도 많습니다. 상사 대신 일 처리하느라 아래 직원들만 바빠지는 거죠. 때로 비굴하기까지 한 그를 볼 때면 생각이 많아져요.”
아무래도 한 회사에 오래 근무하다보면 일종의 권력이 생기게 마련이다. 차곡차곡 세력을 넓혀왔기 때문에 안하무인이 되기도 한다. 설계회사에서 일하는 S 씨(여·27)는 같은 회사 경리팀에 근무하는 여직원을 보면 무서운 게 없는 것 같다고.
“고등학교 졸업하고부터 지금 회사에서 일한 터라 햇수로는 15년 가까이 됩니다. 사장님 빼고 최고참인 셈이죠. 게다가 업무상 회사 돈을 관리하다보니 은근히 권력 행사를 하기도 해요. 나이도 많지 않은데 오래 근무한 걸 무기삼아 윗사람들한테 슬쩍 반말 섞어가면서 말대꾸하는 거 보면 보기 좋지는 않죠. 가끔 술 먹고 다음날 안 나오기도 하고, 나와도 구석 자리에서 하루 종일 엎드려 자기도 하더라고요. 법인카드로 먹고 싶은 거 사다먹기도 하고요. 오래 근무할수록 회사 내에서도 모범이 돼야 하는데 그 직원은 배울 게 하나도 없네요.”
오래 근무했다는 이유만으로 젊고 능력 있는 직원을 못살게 구는 이들도 있다. 통신 서비스 회사에 근무하는 C 씨(30)는 옆에서 그런 상황을 목격했다.
“20대 초반 어릴 때부터 파트타임으로 일하다 정직원이 된 여직원이에요. 지금은 30대 중반 돼가니까 정말 오래 일한 거죠. 아무리 오래 일했어도 신입 직원들한테 밀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능력 있는 직원들한테 일부러 작은 일만 시키고 상사들한테는 능력 없다는 식으로 보고해요. 그렇게 신입 직원이 견디다 못해 나가면 결국 요즘 애들은 안 된다는 식이죠. 직접 관련된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옆에서 보다 보니 저까지 정신적으로 피곤해지더군요. 그런 식으로 오래 버티면서 근무하는 게 절대 좋아 보일 리가 없죠.”
한 회사에 오래 근무했다는 건 분명 대단한 일이다. 그러면 부럽기까지 해야 되는데 앞의 사례들처럼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최근 한 취업포털에서 476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체의 63.2%가 장기근속 직원에게 혜택이 있다고 답했다. 후배들의 찬사를 받으며 당당하게 혜택을 받으려면 오래 다닌 것만큼 노련하게 주변 관리도 잘해야 할 듯하다. 그래야 이후로도 더 오래 다닐 수 있지 않을까.
이다영 객원기자 dylee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