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중매 믿었더니…” 패물 갖고 줄행랑
▲ 엄 씨와 베트남 여인 마 씨의 결혼 사진. 이들의 결혼은 한 달만에 파경을 맞았다. |
엄 아무개 씨(56)는 1년 전 아내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자식들의 권유로 재혼을 결심했다. 엄 씨도 처음에는 “남부끄럽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농협중앙회가 중매를 선다는 얘기에 귀가 솔깃했다. 그동안 다문화 사업을 해오며 지역 안팎에서 각광을 받아온 농협중앙회였기에 더욱 신뢰가 갔던 것이다. 또한 한국의 여성가족부격인 베트남 여성연맹에서 검증된 여성을 소개해준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결국 엄 씨는 지난 4월 베트남 여성 마 아무개 씨(38)와 단숨에 결혼에 골인했다. 그는 “비록 (마 씨와) 안 지 1~2주 남짓이었지만 결혼식 이틀 전부터 함께 잠자리를 할 정도로 사이가 좋았다”면서 “마 씨의 다섯 살 난 딸을 입양하려고 했을 만큼 결혼 생활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이들의 결혼은 당시 베트남 현지 언론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그동안 ‘한국남성과의 결혼 금지’ 조치를 고수해왔던 베트남 정부가 마침내 합법적으로 인정한 첫 국제결혼 사례였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마 씨는 베트남 일간지인 <전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처음에는 엄 씨가 나이도 많고, 촌스러워 보였지만 ‘만약에 나를 선택한다면 다시는 어려운 삶을 살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그의 말에 감동받았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생겨서 기쁘다”고 결혼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행복할 것 같았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뉴스에서나 접할 수 있었던 일이 엄 씨에게 닥쳤던 것이다. 엄 씨는 “결혼식 직후부터 마 씨의 반응이 수상쩍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마 씨가 갖고 있던 부채 약 1000달러를 갚아주고 모친의 생활비까지 줬는데도 자꾸만 갖은 핑계를 대며 ‘돈이 더 필요하다’고 보챘다”면서 “몸이 아프다면서 ‘말 뼈’가루를 사달라고 하질 않나, 결혼하고서부터는 돈은 돈대로 달라고 하고 잠자리는커녕 입맞춤도 거부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엄 씨가 마 씨에게 건넨 돈만 해도 약 1000만 원에 달했다. 결혼식 비용까지 합하면 모두 2500만 원이 지출됐다.
이런 와중에 마 씨는 한국입국 한 달 만인 지난 8월 6일 엄 씨가 농장 일로 자리를 비운 사이 패물과 집안에 남아 있는 현금을 몽땅 훔쳐 달아났다. 현장을 목격한 이웃주민은 “마 씨가 베트남 남성 1명과 사전에 세워놓은 것 같은 택시에 올라타더니 재빨리 자리를 떴다”고 전했다. 도주 직전 마 씨가 엄 씨에게 남겨 놓은 것으로 보이는 편지에는 “남편이 내게 무관심했다. 남편의 대머리가 싫다. 밤에 볼 때마다 무섭다”는 ‘웃지 못 할’ 말이 적혀 있었다.
국가가 직접 중매를 선 국제결혼 1호가 이렇듯 ‘황당한’ 파경을 맞자 베트남 당국과 농협중앙회는 곤혹스러워하는 모습이다. 농협중앙회 최호영 차장은 “사전에 결혼 당사자 간의 기본 정보를 공유했고 베트남 정부가 직접 ‘검증’한 신부들이 합숙 교육까지 받는 등 철저한 절차를 거쳤는데 이런 일이 생겨 당황스럽다”면서 “조합원들을 위해 마련한 결혼사업이었으나 앞으로 사업을 계속 해나가야 할지에 대해서는 자체적으로 좀 더 고민해볼 예정이다”고 밝혔다.
최 차장은 이어 “엄 씨 커플의 결말이 안 좋게 된 반면 이번 시범사업을 통해 성사된 나머지 세 커플은 무사히 결혼식을 치르고 현재 행복하게 살고 있다. 아무리 검증된 절차를 거친다 해도 사람 마음속까지 어찌할 수는 없는 것 같다”며 결혼중개사업의 한계점을 설명했다.
지난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국내 결혼 10건당 1건이 국제결혼이다. 결혼 적령기를 넘길 때까지 ‘짝’을 찾지 못한 농촌 남성이 갈수록 급증하면서 돈을 주고서라도 외국인 신부를 맞이하는 일이 흔해졌기 때문이다. 특히 이 가운데 베트남 신부는 한국인과 생김새가 비슷하다는 이유에서 단연 인기다.
그러나 베트남 정부가 한국 남성과의 결혼을 금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에 우후죽순처럼 설립돼 있는 영세 국제결혼중개업체를 통해 비밀리에 국제결혼을 진행하다보니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결혼 후 돈을 먹고 튀는 일명 ‘먹튀’ 신부들로 인해 수많은 농촌 노총각들이 망연자실해야만 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3월과 5월에는 연이어 베트남 신부가 한국 남편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제결혼 시장은 꽁꽁 얼어붙었다.
이런 정황 속에서 농협중앙회가 국제결혼중개 사업을 등록하고 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자 국제결혼 시장은 다시 장밋빛 미래가 예고되는 듯했다. 그러나 이번 사건으로 가뜩이나 현대판 ‘매매혼’으로 비난받아 왔던 ‘국제결혼’의 미래는 더욱 불투명해졌다.
유명 국제결혼중개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유유근 대표는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심각한 외국인 불법체류자 천국이다. 체류비자가 없어도 어디에 가서든 쉽게 돈을 벌 수 있고, 불법체류자를 고용한 한국인 업주도 아주 가벼운 처벌만을 받기 때문에 국제결혼을 빙자해 이주해오는 여성들로 인해 한국 남성만 피해를 본다”고 주장했다. 유 대표는 이어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데도 정치인과 관계당국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냥 뒷짐만 지고 있다”고 비판했다.
‘러브(love)인 아시아’가 아니라 ‘로브(rob:사기치다)인 아시아’로 전락하기 전에 좀 더 면밀한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김포그니 기자 patronus@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