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자체 권한·재정 늘어 매력적…국민의힘 서울 구청장 선거에 전직 의원 전면 배치, 일각 ‘생태계 교란’ 논란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이 특별시와 광역시 구청장 공천을 마무리 짓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4년 전 더불어민주당에 참패했던 국민의힘은 서울의 25개 구청장 선거에 국회의원 출신 인사를 전면 배치하면서 4년 전 지방선거 참패 설욕을 벼르고 있다. ‘우상호 라이벌’로 잘 알려진 이성헌 서대문구청장 후보, '강원 고성 출신' 정문헌 종로구청장 후보는 재선 의원 출신이다. 정태근 성북구청장 후보는 18대 국회에서 한 차례 의원직을 수행한 바 있다.
국회의원 경력이 있다고 구청장 공천이 ‘프리패스’는 아니다. 아직 공천이 완료되지 않은 몇몇 지역구에선 국회의원 출신 인사들이 절박한 생존 경쟁을 펼치고 있다. 서초구청장 예비후보인 방송인 출신 유정현 전 의원과 강남구청장 예비후보 이은재 전 의원이 대표적인 사례다. 보수세가 강한 두 지역구 중 강남구에선 ‘여성 공천 추진 논란’이 불거졌고, 서초구에선 단수 공천 잡음이 부상했다. 전직 의원들이 쉽지 않은 경쟁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이를 바라보는 정치권에선 격세지감이라는 반응이다. 지역구 국회의원과 구청장이 ‘갑과 을’ 사이였던 과거와는 확연히 다른 풍속도다. 국회의원을 지낸 베테랑 정치인이 체급을 낮춰 구청장 선거에 출마하는 데에 거부감이 없는 양상이 연출되고 있다. 정치권 한 관계자는 “국회의원보다 특별시나 광역시의 구청장이 더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재미’가 무엇인지 구체적인 설명을 이어갔다.
“특별시와 광역시 구청장의 경우 인구수에 비례해 구청장 권한이 조금씩 달라지는 부분이 있다. 인구수가 많으면 구청장 권한이 더 커지는 방식으로 지역마다 적용 기준이 다르다. 여기다 지방자치제가 뿌리를 내리고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지자체 세수 창출은 점점 늘어나는 형국이다. 서울을 예로 들면 부동산세, 자동차세와 더불어 담배세가 지방세로 거둬진다. 지자체가 활용할 수 있는 금액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가하고 있는 양상이다. 모든 흡연자들이 금연만 하더라도 지방세 세수 규모에 입히는 타격은 어마어마할 것이다.”
지방자치제가 성숙해지면서 재정적 여유가 생겼고, 이에 따라 구청장직이 ‘정치 시장’에서 가지는 지위에 변화가 생겼다는 분석이었다. 이 관계자는 “특히 서울시나 여타 광역시 산하 구청의 경우엔 가용할 수 있는 금액이 굉장히 많아졌다”면서 “시간이 흐르면서 지자체가 개최하는 축제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데, 이런 축제들 역시 늘어난 지방세 수입에 따른 나비효과라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처럼 각 구청이 중앙정부에서 예산을 받아서 간신히 공무원 봉급을 주고 그런 시대가 아니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진입한다는 대의명분 아래 지방 세수가 많아지면서 구청장이 휘두를 수 있는 무기가 훨씬 강력해진 것”이라고 했다. 과거 광역시 구청장 선거 기획을 맡은 경력이 있는 한 관계자의 말이다.
“국회의원은 여당 소속이면 장관급, 야당 소속이면 차관급 대우를 받는다. ‘중앙’이라는 단어에 대한 메리트가 적지 않은 시대가 있었다. 그런데 그 시대가 지나가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장은 그 지방의 왕과 같은 권한을 가질 수 있다. 지역 경제는 지자체에서 사업을 발주하는 것이 지역 주민을 먹여 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수도권에서 비수도권으로 갈수록 그 정도 차이가 심하다. 여기에 지방자치단체장은 공무원에 대한 인사권까지 거느리고 있다. 단순 비교를 해봤을 때도 구청장과 같은 지방자치단체장이 더 매력 있는 자리라고 느끼는 전직 의원들이 점차 생겨나고 있는 상황이다.”
또 다른 지역 정치권 관계자는 “돈이 많이 돌면 돌수록 이권이 늘어나는 것 역시 당연한 이치”라면서 “특히 지자체 권역에 거주하는 인구가 많을수록 지자체 내부 이권은 늘어날 수밖에 없다”고 했다. 관계자는 “그런데 500만 원짜리 사업도 구청장이나 군수 서명 날인이 없으면 진행하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라면서 “지자체장 결심만 있다면 수십억, 수백억 원대 사업도 일사천리로 진행될 수 있다. 조 단위 예산을 배정하는 것보다 억 단위 예산을 집행하는 게 정치인들 입장에선 더 큰 이점이라고 느낄 수 있는 까닭”이라고 설명했다.
체급을 낮춰 구청장 선거에 도전한 역사 첫 페이지에서 꼭 거론되는 인물이 있다. 바로 고 노승환 전 국회 부의장이다.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 부친이기도 하다. 노 전 부의장은 마포 권역에서만 5선을 일궈낸 인물이다. 제13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뒤 잠시 재정비를 하던 그는 1995년 펼쳐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마포구청장 직에 출사표를 던졌다. 그는 1995년과 1998년 민주당과 새정치국민회의 타이틀을 달고 재선 마포구청장으로 정치 커리어를 마무리했다.
1990년대 진보 진영에서 활동하던 한 정치권 관계자는 “노 전 부의장은 평생 야당 의원만 했다”면서 “구청장으로 한 집단을 이끌어가는 경험을 정치 인생 마지막에 완성했다”고 했다. 이 관계자는 “노 전 부의장은 ‘전직 의원의 구청장 러시’ 시초가 된 인물”이라면서 “구청장이 선출직이 아닌 임명직일 당시 3급 혹은 4급 공무원 대우를 받았는데 국회의원 출신이 민선 구청장으로 출마한 건 당시로선 굉장한 파격이었다”고 했다.
그는 “좋고 나쁜 평가가 교차할 수 있지만, 노 전 부의장이 시대를 앞서간 발상의 전환을 해낸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면서 “지나간 시대 정치는 ‘급수’로 서열이 매겨졌다면, 현 시대 정치는 ‘재정 총량’으로 서열이 나뉘는 방식으로 서서히 변화하고 있다. 지자체 별 ‘돈의 차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했다.
다만 체급을 낮춰서 특별시 및 광역시 구청장 직에 출사표를 던지는 전직 의원들을 둘러싼 ‘생태계 교란’ 논란도 현재 진행형이다. 서울시 구청장 선거 예비후보로 등록했던 한 인사는 “차후 총선 공천 가능성이 줄어든 인사들 중 일부가 구청장 선거에 승부수를 던지는 장면이 연출되고 있다”면서 “‘용 꼬리보다 뱀 머리’라는 인식이 있을 수 있지만, 국회의원이 하는 정치와 지자체장이 하는 정치엔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존 정치권에서 존재하는 ‘체급’을 뒤로하고 지자체장 선거에 출마한 전직 의원들이 정치권 질서에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정치인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대통령’의 권한을 지역에서 작게나마 이뤄보려는 욕심이 이런 상황의 발단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주장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