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의뢰 민주당에 부메랑으로, 김경수 지사직 상실 등 후폭풍…1년여 전 새 주인 맞아
파주 출판도시에 위치한 한 건물. 2층으로 연결되는 외부 계단이 눈에 띄는 곳이다. 길가엔 차량이 줄지어 주차돼 있었고, 인적은 드물었다. 평온한 일상을 누리고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이곳은 4년 전 대한민국을 들썩인 이슈의 중심이었다. ‘드루킹 사건’으로 유명세를 탄 느릅나무 출판사가 사무실로 쓰던 공간이었다.
느릅나무 출판사는 2010년 문을 열었다. 2018년 2월 폐업신고를 할 때까지 출판한 책은 단 한 권도 없었다. 그렇다면 책을 내지 않는 출판사 사무실은 어떤 용도로 사용됐을까. 느릅나무 출판사는 드루킹 김동원 씨가 아지트로 활용했던 공간이다. 김 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인터넷 카페 ‘경제적 공진화 모임(경공모)’ 오프라인 모임을 출판사 사무실에서 주최했다고 한다.
공진화라는 단어는 생소하다. 생물학 용어로 함께 진화한다는 뜻이다. 경공모라는 단체 이름을 말 그대로 풀어보면 경제를 함께 진화시키는 모임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김 씨는 출판사 사무실에서 경공모 카페 회원들을 대상으로 하는 유료 강연을 진행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경공모 회원이었던 한 관계자에 따르면 강연료는 한 시간에 1만 원이었고 토요일마다 2시간씩 정치와 경제 분야 등에 대한 강연이 이뤄졌다.
느릅나무 출판사 사무실은 내부적으론 ‘산채’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산적들 소굴이란 뜻이다. 2017년 5월 초엔 제19대 대선을 앞두고 출판사 사무실이 위장 선거사무실로 의심받기도 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드루킹을 비롯한 경공모 회원 2명에 대해 수사를 의뢰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당시 이들은 모두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세간의 시선이 파주의 작은 출판사로 쏠리게 된 흐름은 반전의 연속이었다. 2017년 방송인 김어준 씨가 작은 공을 쏘아 올렸다. 김어준 씨는 TBS라디오 ‘김어준의 뉴스공장’과 팟캐스트 ‘다스뵈이다’ 등을 통해 댓글 부대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김어준 씨는 당시 문재인 정부를 비판하는 댓글과 관련해 “이거 전부 댓글부대가 단 댓글”이라면서 “댓글을 달 때 위에서 지시를 받아서 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2018년 1월 조직적 댓글 조작 논란과 관련한 소문들이 여권 내에서 공공연하게 돌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2018년 1월 8일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댓글 조작 논란 수사 촉구’ 청원이 올라왔다. 그러던 1월 17일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게재된 기사 하나가 특정됐다. 이 기사 베스트 댓글이 4만 건이 넘는 공감을 받으면서 댓글 조작 논란이 격화했다. 네이버는 “사람 손이 아닌 프로그램 조작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며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당시 추미애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디지털소통위원회 산하 가짜뉴스댓글조작법률대책단을 출범시켰다. 법률대책단은 네이버와 따로 움직이며 악성 댓글 수백 건을 ‘매크로 조작 의심 사건’으로 수사 의뢰했다. 1월 31일엔 민주당이 네이버 기사 댓글 조작 의혹과 관련해 경찰 고발장을 직접 제출했다. 드루킹 사건이 본격적으로 발화한 계기였다.
뚜껑을 열어보니 반전이 일어났다. 민주당이 의뢰한 수사 대상 중 드루킹을 비롯한 인물들이 민주당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까닭이었다. 2018년 3월 21일 경찰은 느릅나무 출판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했고, 드루킹 등 3명을 긴급체포했다. 사흘 뒤인 3월 24일 이들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이후 4월엔 경찰 수사를 통해 드루킹 사건과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의 연관성과 관련한 의혹이 제기되기 시작했다.
2018년 지방선거를 코앞에 두고 터진 메가톤급 이슈였다. 자유한국당(현 국민의힘)은 드루킹 사건을 국면 전환 카드로 봤다. 4월 24일엔 느릅나무 출판사 앞에서 비상의원총회를 열었다. 자유한국당에서 당직을 지냈던 한 관계자는 “2018년 지방선거는 제19대 대선 이후 첫 전국단위 선거였다”면서 “자유한국당은 어떤 방식으로든 ‘탄핵의 굴레’에서 빠져나올 전환점이 필요했는데, 드루킹 사건에 그 열쇠가 있을 것이라는 공감대가 형성됐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심지어 ‘친문 핵심’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가 2018년 지방선거에 출마하면서 드루킹 사건 존재감이 부각됐다. 자연스레 매크로 프로그램 ‘킹크랩 시연’이 이뤄진 무대로 알려진 느릅나무 출판사 사무실이 주목을 받았다. 2016년 11월 김 전 지사가 느릅나무 출판사 사무실에서 ‘킹크랩 시연’을 봤는지 여부가 사건 쟁점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느릅나무 출판사는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느릅나무 출판사에 모 언론사 기자가 무단 침입해 물건을 훔쳤다는 논란이 불거지기도 했다.
드루킹 사건으로 정국은 얼어붙었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보면 이 사건은 2018년 지방선거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2018년 6월 13일 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압승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광역자치단체장 선거구 17곳 중 14곳을 휩쓸었다. 드루킹 의혹 당사자로 지목된 김경수 전 경남도지사도 당선증을 거머쥐었다. 자유한국당 후보는 TK(대구·경북) 2개 지역구에서만 생존했다. 제주도에선 당시 무소속이던 원희룡 전 지사가 재선에 성공했다.
드루킹 사건이 4년 전 지방선거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배경에 대해 정치평론가 채진원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 교수는 “당시 관점으로 보면 드루킹 사건에 대해 시민들이 면밀한 검토라든가 비판을 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지 않았다”고 돌아봤다.
채 교수는 “당시엔 시기적으로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첫 지방선거였고, 촛불 정부에 대한 기대감이 강했다”면서 “드루킹 사건은 의혹을 규명하는 초입부에 들어선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는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은 상황적 배경이 있었다”면서 “드루킹 사건이 그런 거대한 흐름을 저지하긴 무리가 있었다. 타이밍 차이에 따라 같은 사건이라도 다른 무게감을 지닐 수 있는데, 드루킹 사건이 그 예시가 될 수 있다”고 덧붙였다.
드루킹 사건은 4년 전 지방선거에선 ‘미풍’이었지만, 그 이후로 상당한 정치적 파장을 낳았다. 지방선거가 끝난 뒤인 6월 27일 출범한 특검이 드루킹 사건을 수사했다. 그 과정에서 진보 정치계 거두였던 노회찬 전 정의당 의원이 드루킹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노 전 의원은 7월 23일 ‘드루킹으로부터 금품을 받았으나 청탁은 받은 적 없다’는 취지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 선택을 했다.
드루킹 사건은 2020년대에 들어서야 결말이 났다. 2020년 2월 13일 대법원은 드루킹에 컴퓨터 등 장애 업무방해죄 혐의로 징역 3년,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은 김경수 전 지사에게 컴퓨터 등 장애 업무방해죄 혐의에 대해 징역 2년 선고 원심을 확정했다.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선 무죄가 확정됐지만, 업무방해죄 실형 선고에 따라 김 전 지사는 지사직을 상실했다. 김 전 지사는 재판 과정에서 킹크랩 시연을 봤는지에 대한 부분에 대해 “(느릅나무 출판사) 사무실에 간 것은 맞지만 시연은 못 봤다”고 진술했지만, 대법원은 김 전 지사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차기 잠룡’ 김 전 지사 정치 생명에 제동이 걸렸다.
4년 전 드루킹 사건으로 들썩였던 경기 파주 출판도시의 현재 풍경은 한적했다. 4년 전 대형사건을 잊은 채 일상을 되찾은 모양새였다. 느릅나무 출판사 사무실이 있던 건물 풍경도 4년 전과 확연히 달랐다. 2층으로 올라가는 외부 계단통로와 연결된 유리창엔 ‘느릅나무 출판사’라는 문구 대신 현재 건물에 운영 중인 갤러리 상호가 붙어 있었다.
건물은 외형만 바뀐 것이 아니라 주인도 바뀌어 있었다. 2005년부터 이 건물을 보유했던 A 씨는 드루킹 사건이 느릅나무 출판사 사무실을 쓸고 지나간 뒤인 2020년 12월 17일 매각했다. 가격은 20억 8000만 원이었다.
이동섭 기자 hardout@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