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장보다 너른 잔디 위 캠핑부터 생태관찰로에서 만나는 화산섬 자연까지 이국적 정취 물씬
그냥 들렀다 가기는 영 아쉬우니 하룻밤 묵어가는 것도 좋다. 야영장이 너르니 캠핑이 제격이다. 같은 장소라도 산책과 캠핑의 맛은 전혀 다르다. 산책이 애피타이저라면 캠핑은 풀코스 디너다. 그릇마저 예쁘게 잘 차려진 한정식이 아니라 잎사귀 접시에 날 것의 맛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야생의 밥상이다.
주차를 하고 휴양림으로 들어서는 순간, 가슴이 먼저 탁 트인다. 쉽게 보기 힘든 너른 잔디가 거침없이 펼쳐져 있다. 제주에는 말 방목지도 많고 목장을 위한 초원도 많지만 캠핑과 놀이를 위한 잔디가 이토록 넓게 펼쳐져 있는 일도 드물다. 너른 잔디만으로도 이국적인 정취가 풍긴다. 한없이 펼쳐진 너른 잔디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하지도 못하는 축구가 하고 싶고, 철모르게 뛰어놀고 싶다.
잔디 양 끝으로 캠핑 사이트가 나란하다. 오른 편엔 너른 데크가 늘어서 있고 초원을 가로질러 저쪽 끝 왼편엔 잔디 위에 바로 텐트를 칠 수 있게 밧줄로 선이 그어진 캠핑 사이트가 있다. 잔디 위 캠핑 사이트 가격은 놀랍게도 하룻밤에 단돈 2000원. ‘단돈’이라는 단어가 딱 어울리는 가격이다. 편의점 음료수 한 병 값으로 이국적인 하루를 누릴 수 있다.
잔디를 넘어 안쪽으로 더 들어가면 지붕을 덮어쓴 원두막 형태의 캠핑 사이트가 띄엄띄엄 흩어져 있다. 원두막은 타프(지붕을 쳐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캠핑 장비)가 없는 캠퍼에게도 그늘을 만들어 주고 덤으로 시골 정취까지 느끼게 한다. 비가 오거나 해가 내리쬐어도 끄떡없으니 안심이다. 하룻밤 원두막 사용료도 크기에 따라 6000~8000원으로 역시 저렴하다. 1만 원이 1000원 같은 요즘, 오랜만에 누려보는 ‘만원의 행복’이다.
무엇보다 교래자연휴양림이 이국적인 정취를 풍기는 이유는 곶자왈 때문이다. 곶자왈이란 제주 방언 ‘곶’과 ‘자왈’의 합성어로 곶은 숲을 뜻하고, 자왈은 덤불이나 가시밭같이 어수선하게 엉클어진 수풀을 말한다. 즉, 화산암인 현무암질 용암류 암괴들이 불규칙하게 널려 있는 지대에 형성된 용암숲이다. 제주어 사전에는 ‘나무와 덩굴 따위가 마구 엉클어져 수풀과 같이 어수선하게 된 곳’으로 정의되어 있다.
곶자왈 지대에 조성된 교래자연휴양림, 그래서인지 남태평양 화산섬의 숲속에 와 있는 듯한 이국적인 느낌이 든다. 특히 곶자왈을 제대로 느껴볼 수 있는 생태관찰로에 들어서면 손가락 같은 잎사귀를 활짝 펼친 고사리가 모양도 조금씩 다르게 종류 별로 지천에 널려 있고 초록의 이끼 낀 돌들은 저마다 연륜을 과시한다. 여린 나무들의 가지가 사방으로 뻗치며 봄을 기다린 듯 마구 웃자란 풀들과 엉켜 덤불을 이루고, 울창한 숲속의 틈을 비집고 겨우 파고든 햇빛은 연둣빛으로 발산한다. 신선이 산다면 이런 곳에 살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숲은 깊고 울창하다.
제주 섬 전체 면적의 약 6%를 차지하고 있는 곶자왈은 해안지대와 산악지대 사이 80~600m의 중산간 지대에 넓게 분포하고 있다. 예전에는 주로 사람이 살던 해안과 목축으로 사용되던 산간을 자연스럽게 완충하는 역할도 했다고 한다.
난대림과 온대림을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숲을 형성하고 있어 보존가치 높은 동식물이 공존하는 곶자왈은 곶자왈만의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식물종도 일반 숲보다 더 다양해 600종 이상의 식물을 품고 있다. 제주 안에는 크게 애월 지대, 조천-함덕 지대, 한경-안덕 지대, 구좌-성산 지대 등 4개 지대의 곶자왈이 있다.
고사리 군락과 이끼 낀 돌들이 장식된 정글 같은 곶자왈 숲은 화산활동으로 생긴 뉴질랜드의 어느 숲과도 꽤 비슷한 느낌이다. 마주쳐 지나는 한국 사람의 얼굴이 갑자기 신기해질 정도다. 숲은 정글 같아도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산책로는 말끔하게 단장돼 있어 걱정할 필요는 없다. 휴양림에선 주로 정돈된 야생을 느낀다. 간혹 야생을 갈망하면서도 정작 벌레는 무서워하는 도시인에게 딱 맞는 콘셉트다.
곶자왈 생태관찰로는 1.5km 정도로 출발지점으로 회귀하는 순환로를 돌아 나오는 데 40분 정도 걸린다. 여전히 숲에 목마르다면 오름산책로 쪽으로 이어 걸으면 된다. 큰지그리오름 전망대까지는 8km로 왕복 약 2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제주 생태계의 허파라는 곶자왈을 걸어 나오니 시꺼먼 매연으로 가득 찼던 폐에도 신선한 공기가 가득 찬다.
낮에는 원시의 자연이 살아 있는 곶자왈을 원 없이 걷고, 밤에는 원두막에서 코펠로 냄비 밥을 지어 먹자니 어쩐지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나도 모르게 과거로 들어와 버린 것만 같다. ‘쥬라기공원’까지는 아니더라도 한참 과거로 넘어온 것 같은 생경한 느낌이 텐트 안을 가득 채우는 밤, 곶자왈이 뿜어주는 산소로 공기마저 달콤하다.
제주=이송이 기자 runaindi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