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참여율 올리기 급급, 익명성 보장 소홀…담당 교사 50개 학급 혼자 맡는 등 과로 시달려
학교폭력 실태 조사는 학교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인지하고 효율적인 예방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실시된다. ‘학교폭력예방 및 대책법’에 따라 연 2회 실시되며 매년 4~5월 전수조사를, 9~10월에는 표본조사를 진행한다. 조사대상은 초등학교 4학년~고등학교 3학년 재학생으로 나이스 대국민 서비스를 활용한 온라인 조사를 진행하고, 이름 대신 학생 고유의 인증번호를 입력하는 방식으로 익명성을 보장하고 있다.
설문지가 제출되면 교내 학교폭력 담당 교사는 후속 조치를 한다. 답변 내용 중 피·가해자의 정보, 목격 및 경험 내용 등 구체적으로 작성된 경우 당사자 및 보호자 면담 등을 통해 사실 여부를 파악하는 것이다. 모든 사안은 교사가 인지한 지 48시간 내에 교육청에 보고해야 한다. 이후 전담기구 심의를 통해 학교장 자체 해결의 조치를 취하거나 피해 학생의 요구가 있으면 학교폭력심의위원회를 열어 분쟁을 조정하도록 되어 있다.
문제는 이렇게 매년 들이는 노력에 비해 막상 현장에서 느끼는 학교폭력 예방 효과는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다. 취재 결과, 학교는 암묵적으로 설문조사 참여율을 높여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고, 담당 교사는 수십 건의 학교폭력 사건을 혼자 파헤쳐야 했으며, 학생들은 익명성을 보장 받지 못하거나 피해 사실이 후속조치 과정에서 알려진 사례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설문조사 참여율 올리기에 급급해 설문조사의 목적은 뒤로 밀리거나 익명성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전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설문조사 전 거수를 통해 사전조사가 진행됐으며 광주의 한 학교에서는 수업시간을 이용해 일괄적으로 답변을 제출하도록 지도하기도 했다. 학급 내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학생이 있었다면, 가해자와 함께 있는 공간에서 피해 사실을 제대로 쓸 수 있을 리 없다.
앞서 2015년 성남의 한 사립 고등학교에서는 학교폭력 실태 조사 교육을 위해 학교를 방문한 학교 전담 교육관이 학생들에게 ‘학교폭력이 없었다’는 허위 응답을 강요해 논란이 된 바 있다.
피해 사실을 적었다가 조사 과정에서 알려져 상처를 받은 학생도 있었다. 초등학생 자녀를 둔 김주영 씨(39)는 “아이가 다른 반 친구가 자신을 밀친 것을 적어서 냈는데 담당 교사가 ‘조사를 해야 한다’면서 쉬는 시간마다 아이를 자신의 반으로 불렀다. 반 친구들은 당연하고 다른 반 아이들까지 사건을 알게 됐다. 엄마들 사이에서도 ‘누가 피해자니, 가해자니’ 소문만 퍼졌다. 조사를 하려면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무엇보다 아이가 상처를 많이 받았다. 집에 와서 ‘앞으로는 학교에 말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너무 미안했다”고 토로했다.
익명성에 기댄 조사 방식이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익명으로 조사를 진행하다 보니, 실체 파악에 한계가 있고 답변 내용에 신뢰성도 떨어진다는 것이다. 최근 학교폭력 담당 교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는 한 학부모는 “선생님께서 ‘학교폭력 실태 조사에서 학교폭력 가해자라는 신고가 들어왔다’고 했다. 우리 아이가 학원에서 어떤 아이를 때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그 학원에 다니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오인 신고 처리 됐지만, 그 사이 학교에 소문도 나고 한동안은 잠도 제대로 못 잤다. 선생님께서는 ‘인지한 이상 사실 확인을 위해서라도 이것저것 물어볼 수밖에 없다’고 하셨지만. 조사에 이름만 언급되어도 가해자로 낙인찍힐 수 있으니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학교폭력 담당 교사들은 업무 과중을 호소한다. 서울 마포구의 초등교사 정 아무개 씨(43)는 “우리 학교의 경우 담당 교사 1명이 50학급 업무를 혼자 처리하고 있다”며 “‘학교폭력이 있었다’는 취지의 답변이 나오면 어떤 내용이든 모두 학교폭력대장에 기록하고 조사해서 48시간 내에 교육청에 보고해야 한다. 그런데 막상 조사해보면 과거에 종결된 사건이거나 장난성 답변, 혹은 목격 학생의 오인 신고인 경우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답변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익명 조사다 보니 발생하는 문제지만 교사로서는 한 줄짜리 신고도 꼼꼼하게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해를 거듭할수록 학교폭력 범위가 모호해진다는 것도 교사들이 겪는 어려움 중 하나였다. 예컨대, 물리적 피해가 발생하는 폭행과 달리 집단적·의도적 거리두기가 특징인 따돌림의 경우 가해자의 내심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한데 교육부가 제공하는 지침서만으로는 이를 판단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교육부가 올해 초 발간한 ‘2022년 학교폭력 사안처리 가이드북’에는 따돌림을 “집단적으로 상대방을 의도적이고 반복적으로 피하는 행위 혹은 다른 학생과 어울리지 못하도록 막는 행위”로 정의하고 “학교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특별히 주의를 요한다”고만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정 교사는 “집단적이고 의도적인 따돌림은 명백한 학교폭력이지만, 단순히 마음이 맞지 않는 친구와 거리를 두게 되는 것은 인간관계를 맺는 과정에서 겪는 시행착오다. 그런데 최근에는 친구와 다투고 더 이상 친하게 지내지 않는 것을 따돌림당했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이 많아 지도가 어렵다. 교사로서 이를 지도해보려고도 했지만 ‘학교에서 사건을 은폐하려고 한다’는 오해가 생길까 이마저도 조심스러운 상황”이라고 덧붙였다.
교사들은 학교폭력 실태 조사는 계속 유지하되, 보다 실효성 있는 조사 방식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학교폭력대책심의위원회 소속 상담 교사는 “시시각각 변하는 학교폭력의 유형을 파악한다는 점에서 학교폭력 실태 조사는 필요하다”면서도 “다만 교원의 업무 부담 완화와 학생들의 진정성 있는 응답 제고를 위한 방안 마련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코로나19 팬데믹(Pandemic·대유행)으로 주춤했던 학교폭력 신고건수는 학교가 문을 연 후 다시 늘었다. 5월 30일 서울경찰청에 따르면 2019년 1만 1832건이었던 학교폭력 신고는 2020년 절반 수준인 5555건으로 감소했다가 지난해 6823건으로 증가했다. 신고자의 56%는 초등학생이었고 중학생이 24.3%, 고등학생이 15.3%였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