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 자료’ 효과? 엄격한 양형 기준과 다른 판결 논란…‘벌금형 초과 전력 없다’ 누범이 오히려 감형 요소로
#가족사진, 사업자등록, 한국사능력검정시험까지 ‘영끌’
“장기기증 서약을 하기도 했고, 매일 땀 흘리며 봉사하고 있다. 지은 죄가 가볍지 않아 처벌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반성하며 앞날을 고민하는 점을 가엽게 봐주시기 바랍니다.”
2021년 7월, ‘박사방’의 2인자로 알려진 ‘부따’ 강훈(21)이 2심 결심공판에서 “장기기증 서약을 했다”며 선처를 호소했다. 강 씨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과 함께 아동·청소년 7명을 포함한 피해자 18명을 협박해 성착취물을 촬영·제작하고 배포한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 받은 상태였다. 2심 재판부가 원심 형을 유지하면서 최종 15년 형이 확정되었으나 이와 별개로 강 씨의 호소는 또 다른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그가 반성의 의미로 제출한 장기기증 서약서가 성범죄자들 사이에서 ‘효과 있는 양형 자료’로 통했던 까닭이다.
성범죄 피의자 혹은 그의 가족들이 자주 찾는 한 온라인 커뮤니티가 있다. 하루 1만 명 이상의 방문자가 오고 가는 이곳에는 성범죄를 저지른 이들의 반성이나 한탄글도 있지만 주로 수사기관의 조사나 재판을 앞두고 적절한 대처 방안이나 감형을 받기 위한 정보가 공유된다. 특히 낼 수 있는 양형 자료는 영혼까지 끌어모아 내는 것이 좋다는 것이 이 온라인 커뮤니티의 전반적인 분위기다. 회원들 다수는 “피해자와의 합의를 최우선으로 하고 심리상담 내역이나 가족사진 등도 내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강제추행 혐의로 피소된 한 피의자는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면 못할 것은 없다”는 조언과 함께 수사기관에 제출한 양형 자료 목록을 공유하기도 했다. 그가 제출한 양형 자료는 주민등록등본, 가족사진, 초‧중‧고등학교 당시 반장 임명장과 표창장, 대학교 시절 봉사활동 내역, 장학금 내역, 대학교 성적표, 헌혈증서, 영어 자격증과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성적표 등 종류만 30건에 달했다.
또 다른 글에서는 태아의 초음파 사진, 장기기증 서약서, 모발기부, 학교 생활기록부, 성범죄 예방 성교육 이수 확인증, 심리상담 내역, 군 경력 증명서, 사업자등록증, 면허증, 걸음 기부, 부채증명서, 국민연금 가입 증명서와 가족 돌봄 휴가 확인서 등 90여 개가 ‘양형 자료 모음’으로 소개됐다. 심지어 네이버 지식인 답변 활동으로 얻을 수 있는 사이버 머니 ‘해피빈’을 기부한 내역을 제출하기도 했다. 사실상 피의자를 둘러싼 모든 것이 양형 자료로 쓰이는 셈이었다.
이에 대해 법조계 종사자들은 “마구잡이식 양형 자료가 정상 참작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일갈했다. 언론을 통해 의견을 밝힌 일부 판사들도 “기준에 없는 자료는 정상 참작되지 않는다”는 쪽이다. “반성문은 극히 미미한 영향을 준다”고 답한 현직 판사도 있었다. 피고인이 아무리 각종 자료를 모아 제출한다고 해도, 감경 요소에 해당하지 않는 자료는 형량 판단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형사 전문 변호사 역시 “피의자는 변명이 아닌 반성을 해야 하는 입장이다. 혐의와 관련도 없는 양형 자료를 방대하게 제출하는 건 진정한 피해 회복 의사 없이 형량 낮추기에만 급급한 것처럼 보여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양형위원회의 양형 기준에 따르면 성범죄·디지털 성범죄 사건의 형량을 판단하는 데 있어서 영향을 미치는 것은 형사처벌 전력과 진지한 반성, 그리고 상당한 피해 회복 등이다. 이외에도 피고인이 자백을 했는지, 수사 초기부터 범죄를 인정했는지 등의 수사 협조도 감경 사유에 포함된다. 특히 촬영물 등을 이용한 협박·강요 범죄의 경우, 피해자와의 합의 여부(처벌불원)는 특별양형인자로 다른 감경 요소보다 우선적으로 고려된다.
#‘장래희망 공무원이라’ ‘어머니와 유대관계 깊어서’…다양한 선처 이유
문제는 엄격한 양형 기준과는 다른 판결문이다. 양형 기준에 없는 자료는 정상 참작하지 않는다는 일선 법조계 인사들의 말과 실제 판결은 다소 달랐다. 일요신문이 입수해 분석한 텔레그램 성착취 관련 판결문에는 성범죄자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양형 자료들이 유리한 사정으로 녹아 들어가 있었다.
2022년 1월, 재판부는 성착취물 공유를 목적으로 한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아동 성착취물 195개를 다운받은 피고인에게 선고유예 처분을 내렸다. 판결문에는 양형 이유가 이렇게 적시됐다.
“선고유예. (중략) 피고인은 초범으로서 아직 어리고 이 사건 이전까지는 모범적이고 성실하게 학교생활을 해왔던 점, 피고인의 모친이 앞으로 피고인을 잘 선도할 것을 다짐하는 점, 현재 세무학과를 전공하면서 향후 세무공무원이 될 꿈을 키우고 있는데, 이번에 한하여 피고인을 선처함으로써 피고인의 장래희망이 좌절되지 않도록 기회를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되는 점….”텔레그램 성착취방에서 활발히 활동해 온 또 다른 피고인에 대해서는 이런 판결문이 남았다. 그에게는 2015년 여자 화장실에 들어가 용변을 보는 여성을 불법촬영한 혐의로 과거 소년보호 처분을 받은 전력이 있었다.
“피고인은 교회에서 만난 아동을 성적대상으로 삼아 저속한 대화를 했고 이들의 몸을 촬영해 올리기도 했다. (중략) 그러나 ‘n번방’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후로는 위 대화방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갓 성년이 되었다. 피고인의 부모가 각별히 돌보겠다며 선처를 탄원하고 있다.”양형 이유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재범 가능성은 어떨까. 성범죄자의 재범 가능성을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한국 성범죄자 위험성 평가도구(KSORAS)가 있음에도 다수의 재판부는 아래와 같은 이유를 들어 피고인들의 재범 가능성이 낮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피고인은 홀어머니의 헌신적인 양육 하에 성장하였는데, 모친과의 유대가 두텁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은 피고인의 재범 가능성을 낮추는 요인이라고 보인다.”범행 시점을 피고인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하기도 했다. n번방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기 전 아동 성착취물을 소지한 피고인은 ‘엄벌 여론이 형성되기 전’이라는 이유로 선처의 대상이 됐고, n번방 사건이 한창 사회적 이슈로 불거진 와중에 불법 도박 사이트를 홍보할 목적으로 음란물을 배포해 1600만 원의 수익을 얻은 피고인에 대해서는 ‘이 사건 범행 전까지 처벌 전력이 없고, 피고인의 부모가 계도를 다짐했다’는 이유로 선처했다.
“피고인은 성폭력 예방 교육을 받고 범죄심리상담센터에서 성인지 왜곡 심리 상담 및 심리 치료를 받는 등 재범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고, 피고인 부모도 피고인이 재범하지 않도록 잘 지도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피고인의 부모가 피고인에 대한 선처를 탄원하고 있는 등 가족과의 유대관계가 비교적 잘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재범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점, 피고인은 형사처벌을 받은 전력이 없는 20대의 대학생으로 장래 성행의 개선 가능성이 높은 점… (후략).”
#“가해자의 개인적인 사정 굳이 판시될 필요 있나” 비판
선처의 기록은 훗날 다른 범죄를 저질렀을 때 또 한 번 가벼운 처벌을 받게 해주는 아이러니한 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실제로 인터넷방송을 통해 만난 12세와 14세의 아동·청소년을 간음하고 이를 촬영해 아동성착취물을 제작한 피고인은 항소심에서 ‘벌금형을 초과하는 범죄 전력이 없다’는 이유로 감형됐다. 양형 기준에 따르면 아동·청소년성착취물 범죄에서 동종 누범은 물론, 이종 누범도 가중 요소에 해당했지만 오히려 감형 요소가 된 것이다. 재판부 논리는 아래와 같았다.
“피고인이 당시 12세 또는 14세의 아동청소년이었던 피해자 2명을 인터넷방송을 통하여 만난 다음 여러 차례에 걸쳐 간음, 유사간음하거나 추행하고, 간음 장면을 약 1분 동안 촬영하여 아동청소년성착취물을 제작했다. (중략) 피고인은 벌금형을 초과하는 형을 선고받은 전력이 없다. 피고인은 배우자 및 2019년생 딸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데, 피고인의 배우자와 장모는 기초생활수급자로서 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피고인은 원심에서 피해자들 및 그 법정대리인들에게 피해를 일부나마 회복하고 (중략) 피고인의 배우자와 부친, 장인, 장모 등 친척들은 피해자들에게 용서를 구하면서 피고인의 선처를 탄원하고 있다.”상황이 이렇다 보니 피해자 입장을 대변하는 쪽에서는 객관적으로 측정 가능한 부분만 양형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성범죄 피해자를 돕고 있는 한 활동가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은 재판 기간 동안 100장이 넘는 반성문을 냈다. 아버지를 시켜 블로그에 자필 반성문도 올렸다. 그러면서도 피해자를 협박한 혐의는 계속 부인했다. 조 씨의 경우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지 않느냐”며 “그런데 항소심 재판부는 ‘반성의 여지가 없다’면서도 ‘개전의 여지는 있다’고 3년을 감형했다”고 비판했다.
당시 항소심 재판부는 양형 이유에 대해 “한 인간으로 교정·교화를 도모하는 측면도 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며 “개전의 여지가 전혀 없다고 할 수는 없고, 조 씨 아버지의 노력으로 피해자들과 합의한 것은 유리한 정상”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조 씨는 항소심이 끝나자마자 태도를 바꿔 자신의 블로그에 지속적으로 2차 가해성 글을 올리고 있다. 최근에는 n번방을 최초 고발한 추적단 ‘불꽃’을 비방하는 글이 올라와 논란이 되기도 했다.
오랜 시간 성범죄 피해자를 변호해 온 한 변호사는 “양형 기준에 따라서만 형량을 결정했다면 그 외 가해자의 개인적인 사정은 굳이 판시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며 “(재판부는) 아니라고 하지만 판결문이 저런 식으로 판시되는 이상, 피고 측은 기준을 벗어난 자료라고 해도 간접적으로나마 효과가 있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이런 사례가 모여 일부 변호사의 ‘감형 성공 사례’ 홍보 자료로 쓰이고, 다음 재판을 앞두고 있는 피고인에게 ‘감형 꿀팁’으로 대물림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최희주 기자 hjo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