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 설계사 주민 ‘짬짜미’ “보험금 못타면 바보”
▲ 강원도 태백에서 사상 초유의 보험사기 사건이 벌어졌다. 병원은 경영난 때문에, 주민들은 가정경제에 보태려고 범행을 저질렀다. 사진은 기사 내 특정 사실과 관계 없음.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단일 지역에서 발생한 보험사기 건으로는 역대 최고액 및 최다 인원이다. 침체된 지역경제 사정 때문에 경영 악화를 타개하기 위해 병원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범행을 저질렀고 보험설계사는 실적 때문에, 주민들은 가정경제의 어려움 때문에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전해졌다. ‘이 지역에서 보험금 못 타면 바보’라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만연돼 있었던 태백지역 보험 사기사건의 전말을 들여다봤다.
병실은 비어있고 환자는 보이지 않았다. 다음 병실을 둘러봐도 마찬가지다. 세 번째 병실에 들어서야 환자 한 명이 침대에 누워있다. 경찰이 태백지역의 일부 병원에 보험금을 노린 가짜환자들이 많다는 제보를 접수하고 해당 병원을 촬영한 동영상 속의 풍경이다.
이 병원 진료기록에는 76명의 환자가 입원해 있지만 실제로는 고작 11명의 환자만이 입원해 있었다. 심지어 침대 옆에 환자복이 아닌 평상복들이 잔뜩 걸려 있는 경우도 있었다. 병원에서 출·퇴근하는 나일론 환자의 옷이다.
이번 사건은 경영에 어려움을 겪는 병원과 실적에 목마른 보험설계사가 환자를 만들고 가정경제에 어려움을 느낀 주민들이 가짜환자 행세로 가세하며 삼박자가 맞아 떨어졌다.
실제로 이번에 적발된 3개 병원 모두 열악한 환경이었다. 일부 병원은 간호사 없이 간호조무사 1명만 있고, 입원 환자에 대해 링거주사 처방조차 이뤄지지 않았다. J 병원의 경우 난방이 되지 않아 입원 환자 스스로 전기장판을 가져와 생활을 해야 하는 실정이었다.
이처럼 병원들은 경영난을 겪게 되자 일명 ‘단골’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제 단속 끝났다. 입원해도 된다”며 직접 환자 만들기에 나섰다. 단골은 과거 자신들의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는 사람들로, 병원들은 이들의 기록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환자 재생산을 해 왔던 것으로 밝혀졌다.
병원들은 이 과정에서 환자들에게 유의사항 등을 교육시키는 치밀함도 보였다. H 병원의 경우 환자에게 “입원기간 중에는 동사무소에 가서 등본도 떼지 말고, 비행기도 타지 말고, 신분증 내는 일과 카드도 쓰지 말라”고 주문했다.
또 병원들은 환자가 3주 이상 입원 시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병원이 받을 수 있는 요양급여비가 삭감된다는 것을 알고 입원기간을 미리 3주로 정해놓기도 했다. H 병원, J 병원, S 의원 등 3개 병의원은 지난 4년 동안 가짜 환자를 내세워 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요양급여비 17억 1000만 원을 편취했다.
환자 만들기는 병원에서만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 S 병원의 경우 입원 환자 중 30%는 병원이 유치한 환자이고 나머지 70%는 보험설계사나 입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환자일 정도로 보험설계사의 환자 만들기 또한 심각했다. 지역사회에 기반을 둔 보험설계사들은 가족이나 친·인척 및 지인들을 통해 손쉽게 환자를 만들었다. 더군다나 보험의 속성을 꿰고 있는 설계사들은 어느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지, 무슨 병명으로 입원을 해야 보험금을 타낼 수 있는지까지 가짜 환자에게 가르쳐 줬다.
▲ 경찰이 촬영한 동영상 속의 빈 병실. 진료기록엔 76명이 입원한 것으로 돼있으나 실제 입원자는 11명뿐이었다. |
허위 입원한 환자의 유형과 사정도 다양했다. 보험설계사인 이 아무개 씨(여·46)는 입원 당일에만 진료 받고 집에서 생활하는 대표적인 차트환자였다. H 의원, J 의원, S 의원의 운영 실태를 잘 알고 있던 이 씨는 병원에 가서 입원수속을 한 뒤 21일이 경과하면 병원에 찾아가 입원비 등을 계산하고 확인서를 발급받아 회사에 보험금을 청구했다. 이 씨는 수시로 입·퇴원을 반복하여 총 8500만 원가량을 편취했다. 심지어 이 씨는 경찰의 통화내역 조사결과 입원기간 90일 중 75일은 태백 이외 지역에 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어려운 가정경제 사정으로 출·퇴근 환자행세를 한 경우도 있었다. 식당종업원으로 딸 2명을 부양하던 김 아무개 씨(여·43)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13회 입·퇴원을 반복하여 6100만 원의 보험금을 편취했다. 김 씨는 입원 중 딸들 식사를 챙겨주기 위해 병원을 빠져 나와 집에서 잠을 자고 밥을 해준 후 병원에 돌아와 생활했다고 진술했다.
또 외출·외박을 하지 않고 장기간 병원에 체류하는 나일론 환자의 경우도 있었다. 일정한 직업이 없던 신 아무개 씨(49)는 S 의원에 2008년 5월경부터 141일간 비의존성 당뇨병, 고혈압으로 장기 입원하면서 6회에 걸쳐서 1300만 원의 보험금을 편취했다. 또 신 씨는 병실에서 “친구가 금융감독원에 있다. 조사를 나오면 해결해 주겠다. 불시점검이 있으면 알려주겠다”며 입원환자를 상대로 3만~5만 원가량을 뜯어내기도 했다.
하지만 가짜 환자의 대부분은 어려운 가정경제 사정으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조사됐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김 아무개 씨(63)는 병원 입원 시 치료비 전액 면제되는 1종 의료보호대상자임에도 보험금을 편취할 목적으로 5개 보험 상품에 가입했다. 이 후 김 씨는 고의로 등산 중에 넘어지거나 나무에서 떨어지는 등 갖가지 방법으로 15회에 걸쳐 입·퇴원을 반복하여 총 1억 2000만 원의 보험금을 편취했다. 김 씨의 기초생활수급비 월 35만 원은 보험료를 충당하는 데 쓰였다.
또 대학생 곽 아무개 씨(여·26)는 생계유지 및 학자금 마련을 위해 보험설계사 박 아무개 씨(여·45)의 주도하에 2008년 7월경 15개 보험상품에 집중 가입했다. 이후 곽 씨는 “보드를 타다가 넘어져 다쳤다”며 41일간 J 의원에 입원하는 등 7회에 걸쳐 190일간 입원해, 4500만 원의 보험금을 편취했다. 이외에도 곽 씨의 가족은 총 약 3억 원가량의 보험금을 편취했다.
병원 관계자가 허위로 입원해 보험금을 타내는 경우도 있었다. H 의원의 사무장인 유 아무개 씨(60)는 2009년 5월 병원업무 중 계단에서 넘어져 다쳤다며 이 병원 환자관리 프로그램인 ‘의사랑’에 입원환자로 등록해 올해 3월까지 총 657일째 입원환자로 되어 있었다. 유 씨는 산재처리를 위해 근로복지공단과 소송 중에 있다. 같은 병원 접수담당 양 아무개 씨(여·44)는 2007년 7월 교통사고로 목이 아파 입원한 것처럼 처리해 3회에 걸쳐 1100만 원을 편취했다. 실제로 양 씨는 입원기간에 입원하지 않고 접수업무를 봤다.
가짜 환자가 만연되자 진짜 환자를 방치하는 부작용도 발생했다. 2008년 3월경 등산을 갔다가 엉덩이를 다친 진 아무개 씨(60·여)는 S 의원에서 28일, 연이어 H 병원에서 22일, J 병원에서 21일, 다시 S 의원에서 21일을 입원하는 등 총 91일간 치료를 받았다. 입원 중에는 진통제 투여로 통증이 완화되었다가 퇴원하면 고통이 배가되자 진 씨는 원주의 대형병원을 찾아가 정밀검진을 받았다. 검사 결과 진 씨는 엉덩이뼈가 썩어 들어가는 것을 발견하고 뒤늦게 치료를 했지만 시기를 놓쳐 결국 수술을 받아야 했다. 허위 환자를 상대하다보니 의사들이 실제 치료가 필요한 환자를 방치한 사례였다.
경찰 관계자는 “이 지역에서 보험금을 못타면 바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좁은 지역사회이다 보니 옆집의 김 씨가 보험금을 얼마 탔는지도 다 알 정도였다. 지능화·전문화돼 가는 보험범죄에 대응하려면 특별법 제정이나 양형 기준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훈철 기자 boazh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