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 참전용사·유자녀 등 익명 인터뷰
- "정치·언론 '정신차려라'" 일갈
[일요신문] '호국보훈(護國報勳)'. 나라를 보호하고 도운 이들의 공훈을 갚는다는 뜻이다. 특히 '보(報)'는 '갚다'라는 뜻 이외에, '나아가다, 알리다'라는 뜻이 담겨있다. 한마디로 대한민국을 위해 피와 땀을 흘리는 이들의 수고를 갚는 것이다.
6·25전쟁으로 산화된 영령(英靈)들과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이제는 노년이 된 아들·딸들의 희생을 잊지 않고 기리는 달이 바로 6월이다.
'일요신문'이 6·25참전용사와 노년이 된 아들·딸들을 만나봤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을 알려지지 않길 원하셨기에 익명으로 표기한다.
― 6·25전쟁 참전용사, "절대로 전쟁 안돼"
"하늘도 울렁, 땅도 울렁, 모두의 마음도 울렁거렸다. 사방에 포탄소리, 총소리, 비행기 소리에 귀가 멍멍했다."
이 아무개 씨는 1950년 6월 25일 전쟁을 겪은 용사이다. 그는 최전방에서 전투에 참여했다. 전쟁의 참혹한 광경을 직접 겪었고, 옆의 동료가 쓰러져 죽는 것을 목격했다.
"총에 맞아 죽기보단 굶어죽는 게 더 많았다. 누가 전쟁터에 따라다니며 밥차려 주나? 풀, 나무, 총탄까지 먹을 수 있는 건 다 먹었다. 살아야 되니까."
그는 국가에서 주는 보상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
"내 동료가 전쟁터에서 다 죽었는데 살아돌아온 내가 무슨 깜냥으로 그런 돈을 받나? 그럴 수 없었다. 그저 이제 앞으로는 절대 전쟁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생각 뿐이다. 후대에 남겨줄 유대한 유산은 '평화'이다."
― 전쟁으로 아버지 잃은 아들·딸 "우리는 힘이 없습니다. 그리고 잊혀져 갑니다"
"아버지, 저희들은 힘이 없습니다. 이제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나이며, 한걸음 한걸음 아버지 곁으로 가고 있는지 모릅니다. 훗날 만났을때 행여 아버지께서 아들, 딸들을 알아보시기나 하실지 걱정되기도 합니다."
6·25전쟁에 희생된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딸의 넋두리다. 가장 억울한 희생자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이다. 그 다음이 그 이후의 세대이다. 부모의 얼굴도 기억하지 못한 채 홀로 세상을 살아야 했던 아들과 딸들은 전쟁 같은 삶을 살아야 했다.
― 맨땅에 헤딩하던 시절 '봉투째 부모님께 드렸다'
"6월 달만 되면 저절로 고개가 숙여져요. 전쟁에 너무 많은 분들이 돌아가셨고, 남겨진 분들은 또다른 전쟁을 겪어야만 했어요. 일 좀 없을 땐 현충원 가보기도 하고 그래요. 정말 잊혀지면 안되거든요."
대구의 모 시장에서 잡화점을 하는 상인의 말이다. 전쟁으로 아무것도 없던 시절. 모두가 가난으로 허덕였다. 물려받을 재산 따윈 있을 수 없는 세대다. 모든 것을 맨땅에 헤딩하듯 하루를 버텨왔다. 갖은 고생을 하며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겨우 얻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돈을 타면 봉투째 부모님께 드렸다.
"옛분들 무궁한 발전상 본 받아야 하죠. 근검절약 안하면 못 살던 시대였어요. 헌옷 주고받고 먹을 것도 나누고, 기술 같은거 있으면 빨리 배우고 일찍부터 고생하고 자립하고 겨우 살아가곤 했어요. 사실 많은 일들을 해왔지만 지금은 이렇게 뒤에서 봉사만 해요.:
이 상인은 사실 유명한 인물이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더 이상 언론에 드러나길 원치않았다. 수십년을 낮은 자세로 봉사만 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한다.
― 모두가 알지만 모른 척 해야 되는 '6·25전쟁' 배경
한반도는 1910년 8월 29일부터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일제강점기(日帝強占期)가 시작된 것이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터졌고 미국이 이끄는 연합국이 승리하면서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비로소 빼앗긴 땅과 주권을 도로 찾은 광복(光復)을 맞이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나라는 가난했다. 해방 소식에 각국에 흩어진 국민들이 조국을 찾아왔지만 식량배급도 끊겼고, 농촌의 곡식도 일본이 다 탈취한 상태다.
"이때 서울 장충단공원과 탑골공원은 사실상 거지들의 집합소였다. 서울역 도동은 지게꾼 마당이었다. 가도, 와도 먹을 것이 없었다. 이때 김구 선생이 부국(富國)에 손을 내밀어 양식을 구했고, 무료 식당과 난민 숙소를 건립했다."
이때는 미군정 때로, 남북에는 각각 임시 정부가 세워졌다. 당시 김구 선생은 통일 정부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은 쪼개져 단독 정부를 세웠다. 김구 선생은 남북을 왕래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외쳤으나, 반대 세력에게 죽임을 당했다. 남쪽은 미군,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하며 이들의 군정 아래 있었다.
1945년 7월 26일 독일 포츠담에서 미국, 소련, 영국의 세 나라의 지도자들은 전후 처리를 논의했다. 그 결과 독일과 한반도의 허리가 잘려졌다. 영국과 소련은 전쟁의 당사국인 일본의 허리를 잘라 나누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미국은 일본을 다 차지했다. 그리고 한반도 절반을 잘라 소련에게 입막음을 삼았다. 소련은 한반도 전체를 삼키려고 북한을 도발했다. 모두가 알지만, 모른 척 할 수밖에 없는 동족상쟁의 비극 '6·25전쟁'의 배경이다. 이후 유엔(UN)에 의해 한반도는 38선을 경계로 남북이 갈라져 두반도가 됐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해방 후 현실이다.
― 나라 정치 제일은 '국방'…정치·언론 '정신차려야'
"일제 식민지 치하 때도 우리나라 양단 안됐어요. 우리나라 통일시킬 책임 누구한테 있어요? 미국과 소련 그 책임 없다고 할 수 있겠어요? 현재 입장에서 우리나라의 정책은 국가 안보가 우선이 되어야 해요. 남의 나라는 100% 못 믿죠. 월남전(越南戰) 보세요. 왜 몰라요 그걸? 정치인들은 이 사실을 알아야 됩니다. 남의 일 구경하듯이 해선 안돼요. 나라 잃은 설움, 국민 잃은 설움, 주권 잃은 설움은 개보다도 못합니다."
6·25참전용사는 이같이 말했다. 그리고 교육도 강조했다. 후대의 물려줄 위대한 유산은 '평화'라는 것이다. 그 평화를 얻기 위해선 지나간 과거의 참극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정치와 언론을 향해 일갈했다.
"정말 모두가 고생했어요. 그때 대구에 아무것도 없었어요. 공장은 무슨...산도 나무도 없었어요. 왜? 먹을 게 없으니까 다 뜯어먹어서. 지금은 너무 좋은 세상이예요. 살기 좋아요. 그런데 지금 마음과 생각은 약해요. 자기 밖에 모르고 집단 만들어서 명예나 바라는 이들도 있죠. 집단 이익들이 만들어 놓은 것들 보세요. 다 자기 것, 자기 식구만 챙겨주기 바쁘지. 정치 진짜 바로 해야 되요. 언론도 정신차리고요!"
남경원 대구/경북 기자 ilyo07@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