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그 남자는 시너통을 집어 들고 사무원들이 있는 넓은 공간으로 간다. 그가 들고 있는 시너통을 다시 바닥에 패대기친다. 그를 본 사무원들이 슬슬 피하는 모습이다. 그 남자는 바닥에 넘어져 있는 시너통의 뒤통수를 걷어차면서 앞에 있는 직원을 보며 소리친다.
“야 너 나 알지?”
거친 어조에서 단단히 벼르고 온 느낌이 든다. 시너가 통에서 바닥으로 토해져 나오고 있다.
“이러시면 안 되죠.”
직원의 항의조 목소리가 들린다. 그 남자가 허리를 굽히고 잠시 후에 불길이 확 치솟아 오른다. 비명소리가 들린다. 그 남자는 불길을 뒤로 하고 입구 쪽으로 유유히 사라지고 있었다. 대구 범어동 변호사사무실 방화 사건의 현장에서 찍힌 CCTV 영상이었다.
엉뚱한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한 것 같다. 과거 대구 지하철에 불을 질러 여러 명을 죽게 한 사건이 있었다. 병원 의사에게 불만을 품은 범인이 지하철에 불을 지른 사건이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다. 어떤 여성은 마지막에 휴대전화 메시지로 ‘엄마 사랑해’를 남겨 보는 이를 안타깝게 했다. 분노의 불을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 불은 자기를 태우기도 하고 남을 죽이기도 했다.
가까이 옆에서 그런 사례를 자주 보았다. 내가 잘 아는 이웃 빌딩의 변호사가 갑자기 사무실을 옮기고 침울해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는 반듯한 성격이었다. 판사 시절도 강직한 재판장으로 유명했다. 함께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그가 이런 하소연을 했다.
“내가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으러 나간 사이에 누가 와서 불을 질렀어. 소방차가 여러 대 출동했는데 자칫하면 빌딩 전체에 불이 붙을 뻔했어. 10년 전에 민사사건을 맡았던 의뢰인이 와서 그랬는데 도대체 왜 그랬는지 이유를 모르겠어. 소송을 할 때 어떤 불만을 얘기했던 적도 없고 결과도 나쁘지 않았어. 그런데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와서 불을 지르니까 황당한 거야.”
또 다른 경우가 있었다. 부산에서 변호사를 하다가 서울로 옮긴 후배가 있었다. 그가 이런 말을 했었다.
“어느 날 법정으로 들어가는데 두 놈이 나타나 갑자기 양쪽에서 팔을 잡더니 나를 달랑 들고 사무실로 가는 거예요. 사무실에 그놈들이 가져온 석유통이 있더라구요. 그놈들이 사무실 바닥에 석유를 뿌리고 일회용 라이터 불을 켜는 거예요. 정말 불을 지르려고 하는 거였지. 내가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죠. 오만 정이 떨어져서 변호사 사무실 문을 닫았어요.”
그들은 왜 그렇게 불을 질렀을까. 김영삼 정부 말 사형판결을 받은 그런 방화범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빌딩 입구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는 바람에 열여섯 명이 사망한 사건의 범인이었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었다.
“아내가 종교에 미쳤어요. 어느 날 집에 들어와 보니까 아이들이 밥도 못 먹고 쫄쫄 굶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도 아내는 그 종교단체에 가 있는 거예요. 눈이 확 돌았죠. 그래서 휘발유 통을 들고 가 그 단체가 들어있는 건물 출입구 바닥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죠. 그런데 입구가 거기밖에 없는 건물이었어요. 사람들이 나오다가 타 죽은 거예요. 내가 왜 그랬는지 정말 후회가 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정권을 넘기기 전에 나 같은 사형수들을 전부 집행한다는 소리가 들려요.”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곳곳에 시한폭탄같이 잠재해 있다. 사람을 죽이는 방화범만이 아니다. 가짜 방송에 속아 수십만 군중이 분노의 파도가 되어 들끓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쉽게 분노하는 사회이기도 하다. 누적되어 온 불공정이 인화성 높은 사회 분위기를 만들었다. 편견만 가지고 다른 것은 보이지 않는 외눈박이 시각이 불씨를 만들기도 한다. 좀 더 정신적으로 성장한 사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외부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