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들의 지혜와 솜씨, 작은 상에 깃들다
절간 외진 방에는 소반 하나가 전부였다[일요신문] 이홍섭 시인의 시 ‘두고 온 소반’이다. 시인이 묘사한 외진 방의 풍경처럼, 반세기 전만 해도 집집마다 한두 개쯤 놓여 있던, 삶의 흔적이 켜켜이 묻어나던 생활필수품이 바로 소반(小盤)이었다. 소반이란 음식을 담은 그릇 따위를 올려놓는 작은 상을 말한다. 좌식 주거문화가 발달했던 우리나라에서는 식생활에서부터 제사 의례에 이르기까지 소반이 여러 용도로 쓰였는데, 이러한 소반을 만드는 전통 기술 또는 그 기술을 지닌 장인을 ‘소반장’(小盤匠)이라 부른다.
늙고 병든 자들의 얼굴이 다녀간 개다리소반 앞에서
나는 불을 끄고 반딧불처럼 앉아 있었다
뭘 가지고 왔냐고 묻지만
나는 단지 낡은 소반 하나를 거기 두고 왔을 뿐이다
우리 민족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소반을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 길림성 집안현에 있는 고구려 고분 ‘각저총’의 벽화 중 생활 풍습을 묘사한 그림에서는 그릇을 얹은 작은 탁자를 볼 수 있다. 또한 각저총 인근에 있는 무용총 벽화에서는 말굽 모양의 다리가 달린 둥근 소반을 찾아볼 수 있다. 신라시대의 토기 중에서는 타원형 소반 그릇도 발견된다.
고려시대에도 소반은 궁중과 민가에서 널리 쓰였다. 2014년에는 문화재청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태안 마도 부근 바다에 침몰해 있던 고려시대 화물선에서 건져 올린 대나무 소반 2점을 복원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소반 문화는 조선시대에 이르면서 더욱 확산됐다. 유교문화와 신분 제도의 영향으로 겸상보다는 독상이 주로 사용되었고, 제례·혼례 등 많은 행사로 인해 여러 종류의 상이 필요하게 되어 자연히 소반 제작 기술이 발달했다. ‘경국대전’ 등의 기록에 따르면 국가 기관에 소속된 목기를 만드는 장인들이 분업하여 소반의 생산을 담당하였다. 또한 민간에서도 수공업에 종사하던 장인들이 생활에 필요한 소반 등 목기류를 제작, 공급했다.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나전 칠 외다리 소반’은 조선시대의 소반 제작 기술을 엿보게 해주는 목공예품이다. 기둥이 하나라서 외다리 소반(일주반)이라 불리는 이 소반은 윗면이 작아 음식 그릇을 올리는 식사용이 아니라 간단히 과일이나 다과를 담는 용도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이 소반의 천판(그릇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상의 맨 윗부분인 상판의 둘레를 막아주는 판)은 부드러운 연잎 모양으로 처리되었고, 상판에는 자개를 이용해 연꽃과 거북이, 물고기 등이 묘사돼 있다.
주로 여성들이 음식상을 차리고 운반하는 까닭에, 소반은 한 사람이 나르기 좋을 만한 크기와 들기 편한 무게의 재질로 만들어졌다. 소반의 재료로는 은행나무, 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등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특히 은행나무로 만든 소반을 ‘행자반’, 느티나무로 만든 소반을 ‘귀목반’이라 불렀다. 또한 소반에는 수복강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새, 나비, 물고기, 학, 매화 대나무 등의 문양을 새기거나 넣었으며, 방수를 위해 투명 옻칠, 흑칠, 주칠 등으로 표면을 마감 처리를 하는 게 보통이었다.
소반의 종류는 산지, 형태, 용도 등에 따라 60여 종으로 분류된다. 특히 산지별로 지역색이 뚜렷하고 제작 기법도 사뭇 달라 해주반, 나주반, 통영반, 충주반, 강원반 등으로 구분된다. 이 중 해주반은 아름다운 조각으로 장식성이 뛰어나고, 나주반은 간결한 자연미가 돋보이며, 통영반은 상의 표면을 깎고 파내어 천판을 만드는 것 등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소반의 다리 모양도 지역마다 특색이 있는데 경상도는 죽절형(竹節形: 대나무마디 모양), 전라도는 호족형(虎足形: 호랑이발 모양), 강원도·경기도는 구족형(狗足形: 개발 모양)이 주로 나타난다. 이 글 도입부의 시에서 언급된 개다리소반은 상다리 모양이 개의 다리처럼 휜 ‘구족형’ 소반을 말한다.
소반은 용도에 따라 궁중에서 사용하는 궐반, 돌을 맞는 아이를 위해 차리는 돌상, 전통혼례 시 신랑과 신부가 잔을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합환주상 등 다양하게 구분된다. 특히 옛날에 고관이 궁중이나 관청에서 숙직할 때 상노들이 음식을 나를 때 쓰던 소반을 번상(또는 공고상)이라 하는데, 상을 머리에 이고도 앞을 볼 수 있도록 공간을 터놓은 게 특징이었다.
소반은 조선시대에 생필품의 하나로 널리 쓰였지만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수요가 점차 위축됐다.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음식을 먹는 ‘일본식 접는 상’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돼 시장에 쏟아졌기 때문이다. 이후 해방과 더불어 서구식 생활양식의 도입으로 식탁과 의자 사용이 급증하면서 그나마 소량으로 제작되던 소반의 명맥은 점차 끊어지게 됐다. 이러한 가운데 소반 제작을 가업으로 이어오던 이인세 명장이 1992년 국가무형문화재 소반장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 전승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현재는 김춘식 소반장이 나주소반의 맥을, 추용호 소반장이 통영소반의 맥을 잇고 있다.
자료 협조=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