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원용 목사 | ||
또한 활발한 사회참여를 통해 질곡의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뚫고 나온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최근 <역사의 언덕에서>(한길사)라는 자서전을 냈다.
강 목사는 비록 ‘현장’의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사회의 원로 지도자로서 한국 정치 무대의 일막일장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목도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그가 자서전에서 쏟아낸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인물평’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강 목사는 ‘대통령 이승만’에 대해 “인간적인 면보다는 정치(논리)가 항상 앞서는 인물”이었다며 그의 권력욕을 비판하고 있다. 또한 그의 언행에 거짓이 있음을 알고 충격을 받았다고 털어놓고 있다.
해방이 된 뒤 이 박사가 환국하자 강 목사는 그를 만날 기회가 생겼다. 이 박사는 강 목사 일행과 얘기하는 도중 손끝을 후후 불며 얼굴을 찌푸리곤 하는 것이었다. 강 목사는 그가 손을 다친 줄 알고 깜짝 놀라서 물자, 이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놈들한테 붙들려 갔을 때 고문당한 손이 지금도 종종 아파서 그래.”
▲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승만, 박정희,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 | ||
강 목사는 또한 자서전에서 백범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가 이 박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적고 있다. 그는 처음에는 그런 소문을 믿지 않았다. 나중에 6·25가 나서 부모를 모셔오기 위해 제2군사령부와 함께 평안북도 순천에서 하룻밤을 묵게 됐을 때였다. 강 목사는 그때 인사참모였던 박남표 장군의 막사에서 함께 잤는데 잠이 들기 전에 그가 넌지시 말을 걸어왔다.
“김구 선생을 암살한 안두희가 지금 이 부대에 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매우 특별한 위치에 있어요. 이 대통령이 ‘이 사람의 인사 이동은 내 허락 없이는 하지 말라’는 지시를 내렸으니까요.”
강 목사는 이 말을 들은 뒤부터 이 박사에 대한 실망과 상처가 더욱 컸다고 한다.
강 목사는 박정희 정권 초기인 1962년 방송윤리위원회 초대 위원장직을 맡았다. 강 목사는 그때 문화방송의 <화제의 벤치>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번은 선글라스가 주제로 올랐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아무데서나 항상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을 숨기고 돌아다니면서 엉큼한 짓이나 하는 사람들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방송이 나간 후 엉뚱하게도 담당 프로듀서가 관계 기관에 붙들려 들어가 곤욕을 치르고 나왔다고 한다. 그때 강 목사는 정보기관 관계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는데, 그쪽에서는 선글라스를 즐겨 썼던 박 대통령을 지칭하는 것인 줄 알고 과민반응을 보인 것이었다.
전두환 대통령의 경우 ‘집권 초기 국정자문회의 원로인사들의 말을 경청하는 등 열린 모습을 보이다가 차츰 원로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노 대통령은 집권 초기 강 목사에게 총리 자리를 제의하는 등 각별한 관심을 보였지만 시간이 갈수록 신뢰를 잃었다고.
▲ 왼쪽부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 | ||
“한보사건을 시작으로 어지러운 정국이 펼쳐졌다. 김영삼 대통령은 청와대에 있는 동안 한푼도 안 받고 골프도 안 치고 칼국수만 먹으며 노력했지만, 결국 개혁은 실패로 돌아가고 측근과 아들의 부정부패로 무능한 지도자로 낙인찍히면서 지지도가 급전직하했다. 이로써 사실상 문민정부는 끝이 났다.”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선 약속을 자주 깨뜨린다고 비판하고 있다. 특히 DJ가 정계 은퇴를 번복한 뒤 정치활동을 재개하면서 “정계 은퇴 약속을 바꿀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선명하게, 충분히 설명하지 못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강 목사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그의 앞날은 맑음과 어둠이 교차하고 있다”고 내다봤다. 또한 “노 대통령의 가장 어려운 과제는 그가 선거에서 제시한 화려한 개혁안을 실현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 강 목사는 “국회의 과반수는 못되더라도 2004년 총선에서 균형을 유지할 정도의 의석은 확보해야 무슨 일이든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국회에서 균형을 이루어내지 못하면 그는 2004년 5월부터 레임덕 현상으로 소기의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경고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