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20일 만에 또 대법 판결 ‘한정위헌’ 결정…헌재의 ‘선전포고’에 법원은 요지부동
그리고 20여 일 만인 7월 21일에도 대법원의 판결을 취소하는 ‘한정위헌’ 결정을 또 내렸다. 사상 세 번째다. 처음 한정위헌 판단을 한 것은 1997년이었다. 당시에도 대법원이 반발했는데 그 후 25년 동안 헌재는 대법원의 법적 판단에 대해 문제 삼지 않다가, 올해 들어서만 2번 연속 한정위헌 판단을 내놓았다. 대법원과 헌재의 힘겨루기라는 평이 나온다. 대다수의 법조인들도 “대법원이 헌재의 역할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된 것 같다”며 어느 정도 헌재의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자칫하면 1~3심에서 끝나지 않고 헌재까지 가는 4심이 공공연해질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법원 판단 잘못, 다시 재판해야”
헌재는 7월 21일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대법원의 판결을 취소했다. 헌법소원을 청구한 GS칼텍스는 1990년 상장을 하려는 기업에는 세금을 감면해주는 혜택이 포함된 옛 조세감면규제법에 근거해 자산 재평가를 하고 주식 상장을 추진했다. 하지만 2003년 상장을 포기하면서 자산 재평가는 취소됐고, 세무당국은 개정 이전 법령의 부칙에 따라 1990년도 이후 법인세 등을 다시 계산해 707억 원의 세금을 부과했다. GS칼텍스는 이에 불복, 소송을 제기했지만 대법원은 2008년 “법이 개정됐더라도 특별한 사정이 있으면 부칙이 실효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며 정당한 세금 부과라고 판단했다.
GS칼텍스 측은 법원의 판단을 취소해달라는 헌법소원을 2012년 제기했고, 사건 검토 10년여 만에 헌재는 대법원의 판단을 정면으로 뒤집었다. ‘옛 조세감면규제법’(1993년 개정 이전의 법률) 부칙 23조에 대해 “경과 규정이 없는 법률이 개정되면 부칙은 실효되고, 실효된 조항이 유효하다고 해석하면 입법행위와 다를 바 없어 권력 분립 원칙을 침해한다”며 한정위헌 판단을 내렸다. 법원의 재판 결과를 취소한 셈이다.
헌재는 “법원은 한정위헌 결정의 기속력(구속력)을 부인해 재심 청구를 기각했다”며 “모두 ‘법률에 대한 위헌 결정의 기속력에 반하는 재판’으로, 이에 대한 헌법소원은 허용되고 청구인의 헌법상 보장된 재판 청구권을 침해했으므로 (법원의 결정은) 모두 취소돼야 한다”고 밝혔다. 법원이 헌재의 결정에도 조치를 하지 않을 것을 감안, ‘따를 것’을 요구한 것이다.
6월 30일 이뤄진 한정위헌 결정 때에도 헌재는 “법률에 대한 위헌 결정의 기속력을 부인하는 법원의 재판은 그 자체로 헌재 결정의 기속력에 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법률에 대한 위헌심사권을 헌법재판소에 부여한 헌법의 결단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지적했었다.
#‘요지부동’ 받아들일 생각 없는 대법원
한 달여 만에 두 건의 재판취소 결정이 나오자, 대법원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을 냈다. 대법원은 최근 국회에 낸 의견서에서 “헌재는 제4의 국가기관일 뿐 최고법원이 아니”라며 “어떤 형태로든 법원의 구체적 법률해석·적용을 통제하거나 제한할 수 없다”고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 법원의 법률해석권을 침해하는 것은 헌재의 권한을 초과했고, 때문에 헌재의 한정위헌 결정을 따르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첫 한정위헌 판단 당시에도, 청구인들은 헌재 결정을 토대로 ‘다시 판단을 해달라’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당시 서울고등법원은 “법령해석은 법원의 고유 권한인 만큼 헌재가 대법원의 확정판결을 취소하고 한정위헌 결정을 내린 것은 재심사유가 되지 않는다”고 받아들이지 않았다. 헌재 결정을 ‘의견’ 수준으로만 해석한 것이다. 이번 사건들의 청구인들이 다시 법원을 찾아 ‘재심’을 요구하겠지만, 개별 재판부가 앞선 사례처럼 헌재 결정을 재심의 근거로 삼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대목이다.
대법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한 판사는 “판사마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재심의 근거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법원으로 다시 올라가면 어차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결정을 할 것”이라며 “결국 ‘법을 해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최종적인 사법기구’를 대법원은 포기할 생각이 없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판사 출신의 변호사는 “내 방에 사건이 배당된다면 어차피 대법원에서 나온 입장이 있기 때문에 재심을 할 만한 사안인지 한 번 살펴는 보겠지만, 가급적 대법원의 가이드라인을 따를 것 같다”고 덧붙였다.
당연히 헌재는 이런 법원의 입장을 지적하고 있다. 법률의 위헌성 심사를 하면서 이뤄지는 한정위헌 결정도 헌법에서 부여받은 위헌심사권을 행사한 것이기 때문에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헌재가 한정위헌 결정을 내놓으며, 법원에 ‘후속 조치를 이행할 것’을 잇따라 요구한 것도 이런 분위기를 고려했다. 심지어 이석태·이영진 재판관은 “법원의 확정판결이 가지는 효력인 기판력에 의한 법적 안정성을 더 유지시켜야 할 필요가 없다”며 헌재가 법원 재심기각 판결 취소를 넘어 과세 처분까지 직접 판단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그 정도로 분위기가 과거와는 사뭇 다르다. 1997년 한정위헌 판단을 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자 당시 헌재는 법원판결을 존중하는 결정을 내렸다. 헌재는 “법원의 판결은 헌재결정에 어긋나는 것”이라면서도 “(법적용은 잘못했지만) 기본권 침해가 있다고 볼 수 없다”며 법원의 판단을 존중했다. 헌재가 법원의 재판까지 심사를 하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3년 뒤인 2000년에는 당시 김용준 헌재소장을 포함한 헌법재판관 9명 전원과 당시 최종영 대법원장을 포함한 대법관 14명 전원이 저녁식사를 함께 하며 ‘화해를 위한 회동’을 가지기도 했다. 그렇게 갈등은 봉합됐다.
하지만 25년 만에 연달아 헌재가 결정을 내놓자 ‘최고 사법기관을 정하자’는 메시지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개인 의견을 전제로 한 판사는 “처음 헌재를 만들 때 법원에 한정위헌 등에 대한 권한을 주려했지만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헌재에 권한이 간 것 아니냐”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법 해석에 대한 최종 결정권’이 누가 되느냐는 것을 놓고 자존심 싸움으로 번져서 아쉽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근무 경험이 있는 한 변호사는 “법원도 받아들이고 싶지 않겠지만 올바른 분쟁 해결을 위해서는 헌재를 사법부 구조의 정점에 두되, 헌재도 가급적 대법원의 판단을 존중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만 사법 시스템이 4심(1~3심, 헌재 판단)이 되는 것은 막을 수 있다”며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대법원이 권위를 내려놓고 변화할 때가 맞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다만 헌재의 이런 ‘선전포고’는 적절하지 않다는 비판도 있다. 앞선 변호사는 “입법으로 해결을 하거나 헌재와 대법원이 모여 법 해석 권한에 대해 의견을 모으는 모습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며 “우리나라처럼 법원의 판단을 믿지 못하고 3심까지 기본으로 가는 나라에서 헌재까지 법 해석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사건 당사자들의 비용과 시간이 더 많이 들어가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서환한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