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없는 통합…‘안철수 백신’ 부른다
▲ 지난 16일 국회 민주당대표실에서 민주통합당 임시 지도부가 상견례에 앞서 손을 잡고 있다. 유장훈 기자 doculove@ilyo.co.kr |
자리의 성격상 서로 덕담을 나누며 떠나는 자를 환송하는 분위기가 연상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10·26 재·보궐선거와 야권통합 과정에서 당내 제 세력의 수많은 공세에도 극도로 말을 아꼈던 손 전 대표가 작심한 듯 품고 있었던 얘기들을 쏟아냈기 때문이다.
그는 야권통합 방식을 놓고 자신과 갈등을 빚었던 박지원 전 원내대표를 폭력사태가 있었던 12·11 임시 전국대의원대회 이후 만난 적 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전대 이후로 연락한 적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전대 하는 날에도 박 전 원내대표가 토론자로 나오는 줄 몰랐는데 토론하러 나가기에 ‘박 전 원내대표가 극적으로 턴(turn)을 하는구나’ 생각했을 정도”라며 끝까지 통합에 반대한 박 전 원내대표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손 전 대표는 이후 이어진 언론 인터뷰에서도 박 전 원내대표를 겨냥했다. 전대 폭력사태가 박 전 원내대표와 연관된 것 아니냐는 의혹에 대해 그는 “하늘이 안다. 항상 하늘을 상대로 처신해야 한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어떻게 볼지 생각하며 처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DJ의 적자’임을 자부해 온 박 전 원내대표에게 더할 수 없이 가혹한 얘기다. 전대에서 폭력사태를 일으킨 사람들, 또 전대 무효 가처분신청을 강행한 일부 원외 지역위원장들에 대해서도 손 전 대표는 “그것이 과연 민주당을 위한 것이냐”면서 “민주당을 제대로 지키려면 그런 구시대적 악폐를 보여줘선 안 된다”고 일침을 놨다.
조정자로서 참아야 했던 손 전 대표가 마치 울분을 토하듯 속 깊은 말들을 다 쏟아낸 것이다. 그의 말 속에는 지난했던 야권통합이 얼마나 많은 상처로 얼룩졌으며, 16일 출범한 민주통합당이 앞으로 얼마나 험난한 길을 헤쳐 나가야 하는지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듯했다. 요컨대 ‘혁신’은 없고 ‘통합’만 남은 야권통합이었다는 것이다.
우선 이번 통합 과정에선 혁신의 출발점이랄 수 있는 ‘기득권 포기’가 눈에 띄지 않았다. 10월 3일 범야권 서울시장 후보 단일화 경선에서 무소속의 박원순 시장에게 패할 정도로 국민의 호된 심판을 받았던 민주당이지만 통합 국면이 시작되자 마치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한 행태를 보였다. 의원들 입에서 “코끼리(민주당)를 개미(시민통합당)에게 갖다 바치려 한다”, “그들(시민통합당 등 외부세력)이 민주당에 입당하면 그만인 걸 무슨 당대당 통합이냐”는 말들이 스스럼없이 쏟아져 나왔다. 내년 4·11 국회의원 총선거를 앞두고 공천 경쟁자들이 대거 결합하는 것을 경계하려는 의도가 다분해 보였다. 기득권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는 이 같은 행태는 결국 12·11 전대 폭력사태라는 ‘막장 드라마’로 이어졌다. 일부 원외 지역위원장들은 전대 무효 가처분신청을 제기, 이미 출발한 민주통합당의 발목을 잡는 행태까지 보이고 있다.
▲ 11일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손학규 전 대표와 박지원 전 원내대표가 어색하게 대면하는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20년 가까이 민주당에서 일해 온 한 당직자는 “2004년 새천년민주당이 분당될 때처럼 ‘호남 대 비호남’의 대결 구도가 재연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민주통합당 내에서 호남이 수구 기득권 세력으로 몰리고, 이것이 호남 소외론으로 연결돼 결국 ‘호남 대 비호남’의 갈등 구도가 만들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이번 통합 과정에서 야권 대선주자들의 존재감이 약해진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통합의 궁극적 목표가 정권 교체임을 감안하면 이는 더할 나위 없이 심각한 문제다. 손학규 전 대표는 그야말로 “있던 것마저 다 까먹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초반 당내 의견수렴 없이 통합을 밀어붙였다가 박지원 전 원내대표를 비롯한 호남 정치인들은 물론 자신의 측근으로 분류됐던 인사들과도 등을 돌리게 됐다. 가뜩이나 한나라당 출신이라는 핸디캡 때문에 조직 기반이 약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손 전 대표로선 대권가도에 중대한 타격을 입은 셈이다.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이나 정동영 정세균 전 최고위원 등 또 다른 대선주자들 역시 통합 과정에서 이렇다 할 족적을 못 남겼다. 외연 확장과 내부 갈등 해소 등 통합 과정에서 이들이 맡아야 할 역할은 지대했지만 손에 잡히는 성과를 보여준 사람은 없다.
더욱이 당헌상의 ‘당권·대권 분류 규정’에 따라 민주통합당 지도부 경선에 대선주자들이 나설 수도 없다. 야권 대선주자들이 국민들 앞에서 실력을 발휘할 기회를 당분간 찾기 힘든 상황이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이에 대해 “난세에 영웅이 출현하는 법인데 야권통합이라는 중대 국면에서 대선주자들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다”면서 “민주통합당이 출범했지만 야권 대선주자들이 ‘통합 효과’를 누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내다봤다.
이 때문에 벌써부터 “1차 통합은 완수했지만 결국 ‘안철수(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영입’이라는 또 다른 과제에 매진해야 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나온다. 전략통으로 꼽히는 한 민주통합당 의원은 “지금까지 여론조사에서 야권통합정당이 출현하면 한나라당 지지도를 단번에 넘어서는 것으로 나왔지만, 여기에는 기존 정당에 대한 불신이 반영됐다고 봐야 한다”며 “민주통합당이 ‘도로 민주당’, ‘도로 열린우리당’으로 인식되기 시작하면 지지도가 꺼지는 것은 한 순간”이라고 말했다. ‘안철수 영입’, 통합진보당과의 2차 통합 등이 없고서는 기존의 민주당과 차별화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는 동시에 16일 민주통합당 출범이 통합의 완결이 아니라 안철수 원장 등을 끌어들여야 하는 지난한 통합의 시작일 수밖에 없다는 우울한 고백인 셈이다.
박공헌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