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와 불의의 싸움’ 해답 찾는 귀순한 왜군 역할…“연기 고민 빠졌을 때 박해일 격려로 큰 힘 얻어”
“힘들겠구나, 쉽지 않겠구나 했죠. 일단 분량적인 걸 떠나서 감독님께서도 말씀하셨지만 준사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는 인물이잖아요. 물론 역사에 나와 있는 항왜(임진왜란 중 조선으로 귀순한 일본군)이지만 그 과정이 자세히는 나와 있지 않거든요. 하지만 분명한 포인트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처음에는 많이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감독님도 그 고민을 같이 안고 가시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앞서서 ‘명량’이 있었고, 많은 분들이 그 작품을 보셨다는 데서 오는 부담보단 역할로서의 부담이 더 컸던 것 같아요.”
7월 27일 개봉한 영화 ‘한산: 용의 출현’에서 김성규는 항왜 ‘준사’ 역을 맡았다. 기록에 따르면 준사는 ‘한산: 용의 출현’의 시대적 배경인 한산도대첩 직후에 벌어진 안골포해전에서 패한 뒤 조선으로 귀순하지만, 이 작품에서는 한산도대첩 직전 투항하는 것으로 각색했다. 자신의 조국이 일으킨 전쟁의 의(義·옳음)와 불의(不義·그름)를 고민하고 이를 가르는 기준이 절대적인지 상대적인지에 대한 물음과 답을 관객들에게 던지는 작품의 또 다른 화자이기도 하다.
“전란 속에서 한 인간의 고민은 당연히 있을 수밖에 없었겠죠. 제가 맡은 인물은 일본의 사무라이로서 자신이 모시는 주군을 배반하고 새롭게 이순신이란 장군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겨요. 관객 분들이 그 고민을 따라가고, 왜 이순신에게 항왜를 하게 되는지를 자연스럽게 보실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 안고 연기를 했던 것 같아요. 이 전란 속에서 죽음이란 게 뭔지, 그걸 바라보는 이순신 장군의 생각과 신념이 제일 중요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인물의 이야기를 풀어나가려고 했죠.”
준사를 연기하기 위해 김성규는 삭발 투혼을 불태우기도 했다. 와키자카(변요한 분) 등 왜군 장수들이 대부분 꽁지머리를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김성규의 준사는 양 옆의 머리는 남기되 가운데만 밀어버리는, 이른바 ‘촌마게’라고 불리는 일본식 상투 머리로 분장해야 하는 탓이었다. 심지어 처음 이순신과 독대하는 신에서는 상투가 모두 풀어져 산발인 상태로 등장했기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그가 김성규임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웃픈’ 후기가 쏟아지기도 했다.
“사실 외형을 바꾼다는 게 저한테 있어서 걱정되는 지점은 아니었어요. 그전에도 워낙 외형적으로 변화가 있는 작품을 많이 했거든요(웃음). 처음 피팅하고 메이크업 할 때부터 ‘(머리를) 자를 거면 빨리 자르자’ 그런 마음이었어요. 그래야 전투에 참여하는 무게감이 느껴질 것 같아서요. 그런데 머리가 너무 산발이어서(웃음)…. 이 상태로 연기를 자칫 어설프게 했다간 캐릭터가 우스워 보이는 결과가 나올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더 집중해서 찍었던 기억이 나요. 고충이 하나 있었다면 저희가 여름에 촬영해서 (민머리 부위에) 화상까진 아니고 탄 자국이 조금(웃음). 아, 머리는 다 삭발한 뒤에 옆에만 가발을 붙였던 거예요. 가운데만 밀었으면 저도 고민했겠죠(웃음).”
지금이야 웃으면서 말할 수 있지만, 이순신(박해일 분)과의 독대 신은 그에게 있어 가장 고민이 되는 장면이었다. 준사는 이순신과 와키자카, 각 진영의 두 수장 모두와 깊이 연결되는 유일한 캐릭터이면서 작품의 주제 중 하나인 ‘의와 불의의 싸움’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야 하는 인물이다. 그가 이순신을 만나 흔들리면서 결국 의를 택하게 된다는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 신이 가장 중요한 지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박해일 선배님을 처음 만나는 신에서 제 분장이 막 헝클어져 있는 상태잖아요. 그 신이 중요했기 때문에 대기 중에도 고민을 많이 하고 있었고, 그래서 다른 분들을 여유롭게 대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누가 봤을 땐 아마 무서웠을 거예요. 그런 분장을 하고 혼자 앉아 있으니까(웃음). 그러다 문득 박해일 선배님을 봤는데 어쩜 저렇게 평온하실까 싶더라고요. 그리고 막상 대면했을 땐 제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선배님으로부터 위로 아닌 위로를 받았던 것 같아요. 다 찍고 나서도 더 뭔가 했어야 하지 않나 고민할 때 선배님이 충분하다고 평온한 말투로 말씀해주셨는데 그게 정말 큰 힘이 됐어요. 아마 그 힘을 받아서 마지막까지 계속 촬영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어요.”
연기에 있어 김성규가 최우선 순위에 올려놓는 것은 ‘신중함’이었다. 어떤 배역을 맡든 고민 없이 작품에 뛰어든 적은 없었다. 막상 결심을 하고 발끝을 담그려 들어도 두려움이 늘 목덜미를 잡아챘다. 대중들에게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알렸던 영화 ‘범죄도시’(2017) 이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킹덤’(2019~2020), 쿠팡플레이 오리지널 시리즈 ‘어느 날’(2021), 티빙 오리지널 시리즈 ‘돼지의 왕’(2022) 등 최근 2~3년 동안 탄탄한 팬덤을 갖춘 굵직한 작품에 모두 이름을 올렸지만 그럼에도 김성규의 태도는 늘 한결 같았다. 두렵더라도, 어쨌든 해야 한다는 ‘직진 정신’이 크게 한몫을 한 것처럼 보였다.
“매 작품마다 시작할 때 두려움을 느끼곤 하죠. 왜 나한테 이렇게 큰 역이 들어올까. 제가 ‘범죄도시’를 처음 한 뒤로 임팩트 있는 역할들을 계속해 왔는데 매번 작품이 부담스럽고 내가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을 안고 있었어요. 그런 모습이 결과적으로 주어진 걸 어떻게든 책임감 있게 해낸다는 믿음으로 이어진 게 아닐까요(웃음). 제 입으로 제가 진중하다고 말하긴 좀 그렇지만, 그래도 늘 진지하게 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배우로 뛰어온 10여 년 동안 강한 캐릭터로 주로 기억돼 왔지만 김성규는 의외의 ‘스윗한’ 면모도 갖춘 종합선물세트형 배우다. 언젠간 일상적이고 다정다감한 옆집 이웃 같은 역할도 해보고 싶다는 원대한(?) 희망도 늘 마음 한 구석에 품고 있다.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김성규가 등장하는 정통 코미디나 로맨틱 코미디 작품도 기대해 볼 만하지 않을까.
“배우로서 그런 부분이 재미있어요. 강인하고 날을 세운 것처럼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해 보이는 역할들. 배우로서 그 두 가지 면을 보여줄 수 있는 역할들이 매력적인 것 같아요. 제가 아직 코미디 장르는 안 해 봤는데 ‘극한직업’의 이병헌 감독님 같은 분을 만날 수 있다면 너무 좋겠죠. 저도 사람이니까 일상에서 누구를 좋아하기도 하고 밥 먹었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싶은데, 작품에서 누구랑 겸상을 하는 일조차 거의 없어 가지고(웃음). 그런 측면에서 (일상적인 작품을) 해보고 싶어요. 편한 작품에 대한 갈증이 좀 있거든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