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택 주변 침수로 전화 지휘, 집무실 이전 비판 재점화…대통령실 “실시간 대응 문제없었다”
나라에 재난·재해 긴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정치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노란 민방위복을 입고 등장한다. 이를 두고 일부 국민들은 뻔한 쇼에 촌스럽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의 민방위복은 재난과 긴급 상황을 상징하고, 상황을 엄중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표현으로 받아들여진다.
서울·경기·인천을 비롯한 중부지방에 80년 만에 기록적인 폭우가 쏟아지면서 주택 침수와 도로 통제, 지하철 운행 중단, 정전 등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기상청에 따르면 8월 8일 밤 폭 좁은 비구름대가 ‘인천 남부지역-서울 남부지역-경기 양평군’으로 이어지는 지역에 머물며 폭우가 쏟아졌다.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의 경우 오후 9시까지 1시간 동안 비가 136.5mm 내리는 등 서울 남부지역 중심으로 시간당 100mm 이상 비가 쏟아졌다. 서울 시간당 강수량 역대 최고치인 118.6mm(1942년 8월 5일)를 80년 만에 넘어섰다.
2·3·7·9호선 등 한강 이남 노선에서 일부 역이 침수돼 역사가 폐쇄됐다. 도림천이 범람해 저지대 주민들에게 대피 공지가 내려졌고, 11개 자치구에서는 산사태 경보·주의보를 발령했다.
도로통제도 잇따랐다. 반포대로 잠수교와 경부고속도로 서초-양재, 올림픽대로 여의하류-여의상류, 동부간선도로 성수분기점-군자로, 내부순환로 성동-마장, 강변북로 동작대교-한강대교 등이 비 피해로 막혔다.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중대본)에 따르면 이번 호우로 인한 서울·경기 인명 피해는 8월 9일 오전 6시 기준 사망 7명, 실종 6명, 부상 9명 등으로 집계됐다. 이재민 역시 서울과 인천, 경기 지역에서 107세대 163명이 나왔다.
수도권이 ‘물폭탄’ 타격을 받아 국민들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와중에 재난상황을 컨트롤해야 하는 대통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날은 윤 대통령이 휴가에서 업무 복귀한 첫 날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8일 저녁 퇴근 이후 서울 곳곳에서 비 피해가 발생하자 3시간여 만에 시청으로 복귀했다. 한덕수 국무총리는 8일 밤 11시 30분쯤 정부서울청사 중앙재난안전상황실 서울상황센터를 방문해 집중호우 대비상황을 점검한 데 이어, 9일 오전에는 서울 동작구 한강홍수통제소에서 집중호우 현장점검에 나섰다.
8일 자정이 다 돼서야 윤 대통령 목소리가 아닌 대통령실을 통해 대통령 지시사항이 전달됐다.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이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으로부터 집중호우 상황을 보고 받았다”며 “내일 새벽까지 호우가 지속되고, 침수피해에 따른 대중교통 시설 복구 작업에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행정기관 및 공공기관은 상황에 맞춰 출근시간 조정을 적극 시행하고, 민간기관과 단체는 출근시간 조정을 적극 독려하라”고 전했다.
대통령실에서는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서초동 아크로비스타 자택에서 실시간 보고를 받으며 비 피해를 점검했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에 따르면 윤 대통령은 8일 저녁부터 9일 새벽까지 한덕수 국무총리,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오세훈 서울시장 등과 번갈아 통화하며 비 피해상황을 보고받고, 대책에 만전을 기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이 자택에 머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서초동 자택 주변 침수 때문으로 전해진다. 윤 대통령 서초동 자택 주변은 시간당 100mm 넘게 비가 쏟아졌다. 온라인에서는 아크로비스타 내부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물이 쏟아져 나오는 영상이 공유되기도 했다.
당초 윤 대통령은 8일 광화문에 위치한 중대본과 수해현장에 가기 위해 경호팀에 동선 확인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하지만 자택 주변 도로가 막혀 갈 수 없다는 보고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헬기를 타고 이동하는 방안 역시 검토됐으나, 한밤중 주민의 불편을 일으킬 수 있어 단념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윤 대통령은 수도권에 폭우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한 지 약 12시간 만인 9일 오전 9시 30분이 돼서야 민방위복을 입고 모습을 드러냈다. 윤 대통령은 중앙재난안전상황실 서울상황센터에서 중대본 긴급 대책회의를 주재해 수도권 홍수 피해와 관련해 관계부처와 지방자치단체, 유관기관은 비상근무체계를 강화하고 모든 역량을 동원해 인명 피해 예방에 집중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윤 대통령이 재해 상황에서 즉각 일선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야권의 한 관계자는 “국민들은 대통령이 위기를 관리할 수 있는 능력 여부를 떠나, 위기 상황에 일선에 모습을 드러내고 상황을 챙기는 모습을 원한다. 정치인은 이미지가 생명이다. 민방위복을 괜히 입고 나와 회의를 주재하는 게 아니다”라며 “국민들은 집이 침수되고 교통편이 없어 퇴근도 못하는데, 대통령이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다가 아침에 나타나면 국민들이 신뢰를 보내겠느냐”고 꼬집었다.
앞서 강인선 대통령실 대변인은 ‘윤석열 대통령의 지각 출근’ 논란이 불거졌을 때 “대통령의 업무는 24시간 중단되지 않는다. 출·퇴근 개념 자체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
동시에 청와대에서 용산 대통령실로의 무리한 이전 문제가 다시 도마 위에 오르는 상황이다. 당초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과 동시에 용산 대통령실로 이전하겠다는 계획을 꺼내들었을 때 야권에서는 ‘사저와 집무실이 멀어 위급상황에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대처할 수 있겠느냐’는 지적을 했다. 이에 대해 윤 대통령 측에서는 “도로를 통제하고 오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다” “이동식 지휘차량 등을 활용하면 문제없다” 등의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집중호우로 인한 재해가 닥치자 윤 대통령의 발은 묶였다. 고민정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 후보는 자신의 SNS에 “이런 긴급한 상황을 우려해 대통령 관저와 대통령 집무실이 가깝게 있어야 한다 말씀드렸던 것”이라며 “폭우로 고립된 자택에서 전화통화로 총리에게 지시했다고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길 바란다”고 비판했다. 이어 “총리가 아니라 대통령이 직접 지하 벙커에 있는 위기관리센터를 찾아 전반적인 상황을 보고받고 체크해 진두지휘를 해야 한다”며 “대한민국 재난재해의 총책임자는 대통령”이라고 강조했다.
민주당 한 재선 의원은 “본인의 사저 주변이 침수가 돼 대통령이 재해 상황에 움직이지 못했다는 게 얼마나 코미디 같은 일이냐. 그래서 급하게 용산으로 대통령 집무실을 옮기지 말자고 반대했던 것”이라며 “청와대에 있었으면 바로 위기관리센터로 가 국민들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 지지율을 끌어올릴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전했다. 그러면서 “주변 인적쇄신이 문제가 아니라 윤석열 대통령이 바뀌지 않는 한 국민의 지지를 다시 받기 어려울 것”이라고 충고했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윤 대통령의 8일 퇴근시간 및 이후 일정에 대해 “대통령의 출퇴근 시간과 비공개 일정은 따로 확인해주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사저에 위기관리에 필요한 시스템이 구축됐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이를 통해 8일 밤부터 9일 새벽까지 실시간으로 지침과 지시를 내려 대응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 설명했다.
또한 대통령실 관계자는 “상황실이나 현장을 방문하지 않은 것은 대통령실 내부에서도 여러 논의가 있었다”며 “하지만 어제는 기록적인 폭우로 모든 공무원들이 현장 대처에 투입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이동하게 되면 그만큼 수해복구 인력들이 보고나 의전을 해야 해 대처역량이 약화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더욱이 상황실에 한덕수 총리가 있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가면 오히려 혼선이 있을 수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