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ATM’ 역할 한국, 다른 나라보다 변동성 커…기업 수익성 훼손 우려에 가계부채 뇌관까지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중국 견제를 명분으로 핵심 제조업의 미국 내 생산을 강제하는 법령을 잇달아 시행하고 있다. 미국에 해외 기업들의 투자와 일자리가 몰리면 미국 경제는 더 좋아질 수 있다. 달러가 미국으로 빨려 들어가면 전쟁 중인 유럽과 제조업 기반이 약해진 신흥국은 상대적으로 더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다. 우리 경제와 증시도 상당기간 강 달러와 고금리 환경에서 새로운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할 전망이다.
지난 9월 13일(현지시각) 발표된 미국의 8월 소비자물가지수(CPI)가 예상치를 웃돌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이 요동쳤다. 유가와 식품을 제외한 상품·서비스·주택가격 등 근원(Core) 소비자물가 구성요소들이 특히 많이 올랐다. 물가가 정점을 지나면 연준이 기준금리를 더 올릴 명분이 약해질 것이란 시장의 기대는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경제 전반에 가격 상승이 확산되고 있지만 경제지표들은 견조하다. 지난 8일 발표된 8월 말 노동부 신규실업수당 청구건수는 석 달 만에 최저치를 기록하며 예상치를 밑돌았다. 앞서 나온 8월 비농업 신규취업자수는 시장 기대를 충족했다. 공급관리협회(ISM)의 8월 서비스업 경기지수는 4월 이후 최고다.
달러 가치는 이미 20년래 가장 높은 수준이다. 미국은 달러를 쓰지 않는 나라들보다 원자재 수입가격 부담이 덜하다. 러시아산 가스 공급이 중단된 유럽에 에너지를 수출하면서 미국이 31년 만에 경상흑자를 기록할 것이란 관측까지 나온다. 미국 경제가 높아진 물가 부담을 너끈히 감당해내는 모습이다.
미국은 금리를 올렸지만 달러가 강세를 보이면서 상대적 구매력이 더 강해졌다. 미국의 2021년 중위가구 소득은 7만 800달러로 2년 연속 감소세였다. 올해에도 전년 대비 줄어들 것이 유력하다. 하지만 달러인덱스가 최근 1년 새 18%나 오른 점을 감안하면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상대적인 소득은 늘어났을 수 있다.
미국에 대한 투자가 늘어나면서 일자리도 계속 만들어질 것으로 보인다. 미국 의회에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통과된 데 이어 바이든 대통령은 생명공학·바이오 관련 행정명령을 발표했다. 반도체·전기자동차·2차전지 등에 이어 의약 부문에서도 미국에서 생산한 제품이 아니면 불이익을 주겠다는 뜻이다.
전세계 기업들이 가진 달러들이 미국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크다. 공장이 지어지고 일자리가 늘면 미국 연준은 경기 과열을 막기 위해 기준 금리를 계속 올려야 한다. 다른 나라들은 투자 정체와 달러 이탈로 고통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외채가 많은 나라들은 외환위기로 내몰릴 수도 있다.
원·달러 환율 전망은 이미 1400원 선까지 닿았다. 글로벌 자금이 요동칠 때마다 ‘달러 현금인출기(ATM)’ 역할을 한 것이 우리나라다. 이번에도 다른 나라 통화 대비 원화 환율이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이다. 환율이 계속 오르면 주식과 채권을 원화 자산으로 보유한 외국인들은 환차손 위험이 커진다.
기업 실적도 문제다. 고금리 환경에서 살아남으려면 높은 경영 효율이 뒷받침돼야 한다. 환율 상승으로 비용 부담이 커지면 그만큼 수익성이 훼손된다. 유럽과 중국이 경기침체로 우리 상품 수요가 줄어들면 매출 성장에도 제동이 걸릴 수 있다. 반도체와 가전 등 IT 제품이 대표적이다. 전기차와 배터리 등은 앞으로 유망한 산업이지만 구조상 중국과 연결이 깊다.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경제 장벽을 넘어야 한다.
내수에서는 가계부채 문제가 아킬레스건이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면 한국은행도 따라가지 않을 수 없다. 이자 부담이 늘어나면 가계는 소비를 줄이게 된다. 내수 위축 가능성이 크다. 경기 악화로 가계와 기업의 한계차주(원리금과 이자를 못 갚고 있는 대출자)들이 채무상환에 실패하게 되면 금융권 부실로 이어지면서 파장이 경제 전반으로 확산된다.
최열희 언론인